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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화성에 불시착한 스물일곱 청춘의 퍼즐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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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블랙 러시안>/1997

 

블랙 러시안(Black Russian)이란 칵테일을 마셔본 적이 있는가. 깔루아와 보드카를 12의 비율로 잘 섞어주면 강하면서도 달콤한 맛의 블랙 러시안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하기야 성인이 되고 마셔본 칵테일이라곤 진토닉(Gin & Tonic) 밖에 없으니 나는 그 맛을 알리 없다. 이름에서 어딘가 모르게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질 뿐이다. 얼마만큼의 신빙성이 있는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식 검색을 뒤져보니 과거 철의 장막으로 불렸던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소련)을 상징한다고 하니 그 맛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작가 김경욱은 블랙 러시안이라는 칵테일을 소재로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 블랙 러시안에 관련된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기는 했지만 선뜻 그 관련성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이름이 주는 침울한 분위기가 20대의 방황과 닮지 않았을까 생각될 뿐이다. 김경욱의 소설 <블랙 러시안>은 서기 2317 1130, 화성에 불시착한 스물일곱 살의 우주비행사의 고민으로부터 시작한다. 단 열 시간의 산소만 내장된 우주복을 입고 화성에 불시착한 나에게 과연 구원의 손길은 다가와 줄 것인가.

방황하는 청춘의 실체를 찾아 떠나는 여행

 

1990년대의 정치적 상실감을 뒤로 하고도 청춘의 본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방황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살아온 날보다 몇 배는 더 남은 살아갈 날에 대한 불확실성과 막연한 두려움. 의존적 존재에서 하나의 독립체로 거듭나기 위한 성장통. 청춘 특히 20대가 처한 상황은 장고한 인생의 그림에서 뭔지 모를 하나가 빠져있는 것처럼 공허하다. 퍼즐게임에서 마지막 한 조각을 완성해야만 비로소 방황이 끝나겠지만 결코 녹녹치 않은 게 또 청춘의 실체다. 주인공 내가 퍼즐게임의 마지막 한 조각을 찾기 위해 2317년이라는 먼 미래로의 여행을 떠나야만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만일 이십칠 년 동안의 순조로움이 무슨 일인가를 잉태하고 있었다면 그 무슨 일이란 분명히 이 상황일 것이라고 나는 제법 확신을 가지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확신도 진동하는 우주선의 밸런스를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의 본질에 밸런스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 -<블랙 러시안> 중에서-

 

소설은 미래와 과거, 현재를 넘나들며 무슨 일인가를 찾는데 주력한다. 분명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그 상실감의 정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많은 문제들을 세월이 해결해 주지만 그 세월 때문에 풀리지 않는 매듭 같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스물을 갓 넘을 무렵에 탔던 경춘선에서 보았던 풍경과 지금의 그것은 결코 본질이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잃어버린 뭔가로 인해 살아온 세월만큼의 거리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낯선 들판 위에 떠 있는 그 얼굴은 내게 뭔가 말하려 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굳게 닫힌 입술은 스핑크스 동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말을 간절히 하려고 하는 눈빛처럼 보였다. 아주 중요한 말을. -<블랙 러시안> 중에서-

 

퍼즐게임의 마지막 한 조각, 블랙 러시안

 

블랙 러시안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나에게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잃어버린  조각을 맞춰주는 연결고리다. 그 중심에는 옛 애인 은서가 있고 또 UFO(미확인 비행물체)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은서, 그녀의 실종에는 막연하게나마 UFO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UFO를 믿어요. UFO가 정말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젠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건 신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있다고 믿으면 존재하는 거죠. 그리고 UFO 같은 거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UFO 같은 게 있다고 해서 크게 나쁠 것도 없잖아요.” -<블랙 러시안> 중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은서는 다른 시간과 공간의 존재에 대한 열망과 믿음을 찾아 떠난 것이다. 그런 은서가 나와 카페에 갈 때면 늘 마시던 게 블랙 러시안이었다. 블랙 러시안은 나와 은서를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단서이자 과거와 현재 그리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려는 나에게 상실감의 실체, 잃어버린 조각인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비로소 나는 상실과 방황의 시기를 끝낼 수 있는 그 뭔가를 찾은 것이다. 풀 한 포기 없는 화성에 불시착해서 조난 신호용 레이저빔을 쏘아 올리고 있는 나의 시야에 들어온 우주선의 은빛 동체에도 이렇게 적혀 있었다.

 

BLACK RUSSIAN

 

칵테일 블랙 러시안이 강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있다고 했던가. 알 수 없는 상실감에 방황하는 청춘도 그런 블랙 러시안의 맛이 아닐까. 비록 좌절과 희망이 뒤섞여 있지만 잃어버린 파편들을 하나씩 맞춰가다보면 톡 쏘는 강한 맛도 점차 달콤함으로 번져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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