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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절망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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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망원경>/2000년

그댄 외롭고 쓸쓸한 여인, 끝이 없는 방랑을 하는, 밤에는 별따라 낮에는 꽃따라 먼 길을 떠나가네로 시작하는 대중가요가 있었다. 대중가요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를 빼면 뭐가 남겠냐마는 이치현과 벗님들이 부른 집시 여인은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재수라는 낯설은 세계에 내몰린 나에게는 그저 그런 사랑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집시 여인의 방랑은 나의 방황이기도 했다. 절망, 절망 또 절망. 집시(Gipsy)의 방랑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 또한 그랬으리라.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해와 달이 한번도 비춘 적이 없는 온통 캄캄한 어둠뿐인 작은 나라가 있었다. 왕은 다섯 명의 기사들에게 빛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왕의 딸들과 결혼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길을 떠난 기사들은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는 산꼭대기에서 붉은 태양이 온갖 나무와 새들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기사들은 이 곳을 지키고 있던 튀발카인의 후예인 거인에게 부탁해 태양을 어두운 나라로 가져오게 된다. 튀발카인은 집시의 조상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태양을 보낸 튀발카인의 후예들은 오랫동안 빛 없이 지내다 보니 태양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태양이 비추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기 시작했고 결국 그때부터 집시들은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고 한다.

조경란의 소설 <망원경>에서 잭스가 주인공 에게 들려준 집시의 전설은 이 소설의 주제를 함축해 보여주고 있다. 집시들이 태양이 비추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듯이 우리도 그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그 무엇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 무엇의 실체는 모르지만 인간에게 그 무엇은 포기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망원경은 절망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한 자의식의 은유인 동시에 세상을 보는 창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 망원경을 통해서만 나를 볼 수 있는 것일 까 하는 것이다. 주인공 는 아주 부분적인 것은 잘 보면서도 전체적인 것은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시력이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력이 저하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의미가 아닌 현대인의 상실감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그 상실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헌정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있었던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 사람들에게는 추구해야 할 목표나 가치가 확실했다. 다시 말하면 투쟁의 대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독재, 군부정권, 권위주의로 상징되는 1990년대 중반 이전에는 집단의 목표의식이 개인의 그것을 대신했다. 그러나 투쟁의 대상이 사라진 이후, 집단의 목적이 실현된 이후 찾아온 상실감은 개인들로 하여금 목표나 가치에 대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렇다고 현실 속에서 불합리와 부조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개인들에게는 더 큰 절망적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지만 보지 못할 뿐이다. 저자는 불명확하지만 그래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또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망원경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집단의 목표가 사라진 지금 망원경을 통해 본 세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잭스가 동물원에서 홍학의 군무를 아름답게 바라보지만 의 망원경에 잡힌 홍학은 잘린 듯한 뭉툭한 꼬리와 부러진 발가락들, 진흙이 묻은 더러운 깃털이다. 심지어 홍학을 잡기 위해 물 속으로까지 뛰어드는 배고픈 하이에나의 그림자까지 보게 된다.

 

분홍빛 구름이라고? 너 그건 모르는구나. 홍학의 저 색깔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물원에서는 일부러 당근을 갈아 먹이거나 카로틴제를 사료에 섞어주기도 한다는 것 말이다. -<망원경> 중에서-

 

한편 망원경에 포착된 세상은 중장비 기계들의 소음과 함께 산이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누구도 그 자리에 산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은 변하고 있다. ‘는 이 변화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력 저하로 부분적인 것을 잘 보면서 전체적인 것은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반대로 망원경은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만 가까운 사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로소 는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는 태양(그 무엇)을 향해 망원경의 초점을 맞춘다. ‘의 실체를 확인한 후 드디어 눈동자를 태워버릴 것만 같은 광력에 당당히 맞서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에게는 추구해야 할 목표나 가치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는 망원경을 죽은 할머니의 편지를 기다리며 매일같이 우체국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아이에게 건네준다. 아이도 망원경을 통해서 그만의 자의식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했던 상실감은 집단적 목표의식으로 회귀하고 있다. 그것은 전진만 있을 뿐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이함에 대한 반성이다. 굳이 망원경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기억 저 편에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망령들이 너무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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