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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그들이 분노하고 목적없는 질주를 계속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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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의 <깊고 푸른 밤>/1982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있는 백호빈은 조국의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미국 영주권이 필요하다. 그는 재미교포인 제인과 위장결혼을 한다. 제인도 백호빈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흑인과 결혼해 미국에 와서 지금은 이혼한 상태다. 제인은 백호빈과의 위장결혼으로 영주권을 얻어주는 대신 돈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둘은 이민국의 감시를 피해 위장된 동거생활을 시작하지만 남녀 사이에 움트는 사랑은 어쩔 수 없나보다. 제인은 백호빈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느끼게 되고...그들의 결말은 제인의 "당신이 갖는 꿈은 이 사막과도 같은 거예요"라는 한마디에 함축되고 만다.

안성기(백호빈), 장미희(제인) 주연의 <깊고 푸른 밤>(1985년)은 두 젊은 남녀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전개되는 희망과 욕망의 경계를 보여주는 영화다. 비록 '청소년관람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였지만 어찌어찌해서 볼 수 있었다. 그땐 그랬으니까. 이 영화의 원작이 최인호의 소설이라는 것은 새삼스런 언급일지도 모르겠다. 1970,80년대 최인호만큼 대중적인 소설가는 없었으니까. <별들의 고향>, <깊고 푸른 밤>, <겨울 나그네>, <고래사냥> 등 영화는 물론 <불새>, <해신>, <상도> 등 드라마까지 소설가보다는 시나리오 작가로 착각할만큼 최인호의 작품들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특히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당시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분노와 희망과 욕망, 그리고 좌절을 그려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소설 <깊고 푸른 밤>은 사뭇 다른 방향으로 각색된 영화지만 소설과 영화에서 내포하는 주제는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1980년대 청춘들의 방황이 21세기에 그대로 전이된 느낌은 작은 전율을 일으킨다. 

198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깊고 푸른 밤>은 주인공 그와 준호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어느 낯선 친구의 집을 출발해 로스앤젤레스까지 가는 여행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광활하게 펼쳐진 미국의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광활한 미국의 고속도로는 거미줄처럼 복잡해서 한시도 정신을 놓으면 안된다. 또 그들은 끊임없이 분노한다. 그들은 왜 분노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낯선 친구의 집을 떠난 그들이 느낀 감정은 조국을 대하는 그것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이곳을 떠난다면 이 지상에 이러한 집이 있었다는 것은 영원히 망각 속에 묻혀버리게 될 것이다. 이곳을 떠난다면 분명히 하룻밤 머물렀던 저 집 안에서의 기억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ㅡ<깊고 푸른 밤> 중에서-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1980년대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수십년간 지속돼 온 억업의 통치를 끊어버리지 못하고 또 다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야만 했던 당시 청춘들의 자화상이 바로 그들이다. 한때 잘 나가던 가수였던 준호는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가수 활동을 중단한 채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한편 그는 작가였다. 그는 그의 작품이 영화화된 극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늘 상한 짐승처름 이를 악물고 있던 존재다. 그들이 선택한 미국 여행은 그들 스스로 선택한 유배지로의 여행이었다. 그들은 분노의 실체를 모른 채 희망의 땅인 로스앤젤레스와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 1902~1968, 미국)의 소설 <에덴의 동쪽> 무대인 살리나스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들의 방황과 질주를 이끈 분노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대마초로 상징되는 마리화나와 술 그리고 소설의 제목인 깊고 푸른 밤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준호가 그토록 집착하는 마리화나는 파멸인 동시에 파멸을 잊게 하는 또 하나의 위안이 된다. 또 억압의 시대 작가로서의 양심을 지킬 수 없었던 그에게 술은 현실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다. 술에 취해 있어야만 비로소 자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결국 마리화나와 술은 그들이 살아있음을 실감체해 주는 유일한 위안이자 매개체이다.

나뭇가지 위에 열리 나무 열매 하나 때문에 이웃과 싸우고, 동네를 가로지르는 냇물 하나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가엾고도 어리석은 원주민들의 섬이었다. 그가 자신은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닭은 다리가 두 개이며, 개는 다리가 네 개라는 사실을 구별할 줄 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깊고 푸른 밤> 중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분노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현실을 깨달았을 때, 또 현실에 처절하게 패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분노를 내려놓은 그들은 너무 지쳐 있었으므로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에로 영화를 연상하게 하는 '깊고 푸른 밤'은 소설 어디에서도 유추할 수 없는 말이다. 저자는 이런 제목을 통해 분노를 삭힌 그들이 아니 당시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방황이 끝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절망적인 시대 상황에 대한 저항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청춘을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다. 맞다. 그렇게 청춘은 내일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청춘은 아프니까 방황하고 방황하니까 또 아프다. 그러나 그런 청춘의 아픔이 성장통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너무도 잔인한 조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프니까 분노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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