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요즘 대학생들은 무슨 고민을 할까

반응형
오탁번의 <굴뚝과 천장>/1973년

올해는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같이 치러지는 해다. 국회의원 임기와 대통령 임기에 최소공배수라는 수학적 개념을 도입해 보면 20년마다 양대 선거가 같은 해에 치러지는 셈이다. 내가 대학 새내기였던 20년 전에도 그랬다. 일 년 전 백골단에 의해 사망한 명지대학교 강경대 열사의 여운이 남아있던 터라 대학은 그야말로 정치투쟁의 장이었다. 게다가 민주화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김영삼이 군부세력에 투항해 여당 후보가 되어 대통령 선거를 치른 여파도 컸으리라. 대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낭만을 채 즐기지도 못한 채 각종 정치 현장을 발로 뛰면서 나의 시선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나를 뜻하지 않는 고민의 세계로 이끌곤 한다. 오탁번의 소설 <굴뚝과 천장>은 그런 고민의 단상을 회상 형식을 빌어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 현재와 과거의 시대적 배경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좁혀질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독재정권의 억압에 종지부를 찍었던 4.19 혁명이 있은 후 11년이 지난 1971년은 그때와는 다른 세력이 주도한 국가폭력이 횡횡하는 시대다. 11년이라는 시간은 친구의 실종과 죽음으로 하나의 연결고리에 얽히게 된다.

소설 <굴뚝과 천장> 두 개의 석간 사회면 기사를 중심으로 두 사건의 연관성을 추리하려는 주인공 '나'의 고민으로 그려진다.

'11년 전에 실종(失踵)된 대학생(大學生) 변시(變屍)로 발견'
'여대생 굴뚝에서 투신자살'

전자는 주인공 '나'가 '그'와 보냈던 대학 신입생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11년 전 실종되었던 그가 강의실 천장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후자는 나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사건으로 친구 그가 11년 전 이 사건의 현장을 답사한 적이 있다는 것으로 나에게 두 사건은 연관성을 갖게 되고 나는 그 연결고리를 찾으면서 현실에 대한 고민은 깊어지게 된다. 두 사건의 현장이자 소설 제목이기도 한 굴뚝과 천장은 소설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상징한다. 

R양이 자살 장소로 선택했던 굴뚝은 소설 속 표현대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삼켰다가 흔적도 없이 연기로 내뱉어 버리는 곳"이다.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했던 여권의 핵심인사였던 R씨의 딸인 R양은 아버지와 아버지를 둘러싼 부정한 유산들을 굴뚝이라는 공간으로 던져버리고 싶어했던 심정을 육체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한편 친구 그가 선택한 자살 장소로 선택한 강의실 천장은 다락방 형태로 학교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혁명 이후 달라진 게 없었던 현실을 크게 한탄했던 그는 다시 도래할 암흑의 시대를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타자에게는 현실 부적응자로 보였지만 그는 그만의 공간에서 부정한 현실을 조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여대생 자살현장을 답사한 것도 자신만의 공간을 찾기 위한 시도였던 것이다.

나는 그 흉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틀림없이 H선생 흉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B선생의 동상이 훼손되고 나서 없어져버렸던 도서관의 흉상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가 생존 시에 품었던 기괴한 비속의 정신을 다시 만난 것 같아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그는 잠적해버리기 전에 벌써부터 그가 시대와 현실을 거부하고 숨어버릴 장소를 예정해놓고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바지 단추 안쪽에서 갑자기 그것이 커져옴을 느꼈다. 나는 부끄러웠다. -<굴뚝과 천장> 중에서-

한편 친구의 자살로 떠올린 11년 전 대학 신입생 시절 그와 나의 라이벌 관계는 나의 대학 시절과 요즘 대학생들의 고민을 순차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교과서가 보여준 정형화되고 반듯한 세상과 교과서를 탈출한 세상에서 체감하는 부정하고 비뚤어진 세상은 대학 신입생에게 현실과 이상이라는 서로 다른 사회에 대한 커다란 틈을 느끼게 한다. 나도 그랬고 요즘 대학생들의 고민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대개는 주인공 '나'와 친구 '그'의 범주로 구분될 수 있다. 부정한 현실을 목도하지만 나는 나의 일에 매진함으로써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반면 그는 적극적으로 부정한 현실에 저항한다. 나의 눈에는 니힐리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는 부정한 시대와 현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거부한다. 그는 자신의 끊임없는 투쟁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세상에 좌절하고 만다.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되지만 남은 자, 나에게는 부정한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남겨둔다. 그의 좌절은 나를 추동하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대학생들은 무슨 고민을 할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요즘 대학생을 두고 보수적이라느니, 정치에 무관심하다느니 하는 비판 일색이다. 미디어에 의해 조장된 감각적이고 일회성 문화가 판치는 현실 때문이지 싶다. 그러나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이런 비판의 이면에는 젊음이 상징한다는 열정과 낭만이라는 주제를 너무 고리타분하게 해석하는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에게서 젊음의 상징을 앗아간 기성세대의 우(禹)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대학과 사회가 요즘 청춘들에게 지성인보다는 지식인을 강요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임을 잊고 있는 셈이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정치적 관심은 한낱 사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론 정치가 현실이라는 말이 맞다면 참여하는 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명제가 맞겠지. 그러나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안개 속에 갇힌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난파선과도 같다. 그들에게 오직 중요한 것은 삶과의 투쟁이다. 그 투쟁은 소설 속 '나'처럼 소극적일 수도 있고  '그'와 같이 적극적인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게중에는 쓰디쓴 좌절을 맛보고 홍등가 네온싸인 불빛에 취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고민은 침소봉대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에 의해 폄하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한다. 사람이 변하면 고민도 변하는 법이다. 낭만과 열정 대신 삶을 선택한 요즘 대학생들도 변화해 가는 시대의 자화상이다. 억압의 시대를 고민했던 기성세대가 오늘을 만들었듯이 비록 폄하되고 있지만 요즘 대학생들의 삶에 대한 고민과 투쟁은 또 다른 미래의 오늘이 될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