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함흥으로 간 차사는 돌아오지 않는다

728x90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여자 친구를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뭘까요?'라는 질문에 '함흥차사'란 답이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의미로 쏠로인 청춘들에게는 이 단어가 동병상련의 심정이었나 보다. 그렇다. 함흥차사(咸興差使)는 온다간다 말없이 감감무소식인 경우를 말한다. 조선시대 이중환이 쓴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팔도총론' 함흥부편에 함흥차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자 이중환도 야사나 실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함흥차사는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 등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로 태조 이성계가 아들 방원에게 실망하여 고향인 함흥으로 낙향했는데 후에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 된 방원은 여러 차례 차사(差使, 왕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한 임시 관직, 일종의 사신을 말한다)를 파견해 환궁을 권유했으나 이성계는 이를 거부하고 사신으로 오는 차사들을 모두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먼 길을 떠난 이가 생사도 모른 채 연락이 없는 상황을 빗대어 '함흥으로 간 차사' '함흥차사'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당시 함흥으로 파견된 차사 중에서 박순이라는 사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야사와 달리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성계가 사신을 죽였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당연히 태조 이성계편에 사신을 죽였다는 기록을 남길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다음은 <택리지>에 실린 '함흥차사 박순'에 관한 이야기다.

함흥에 사신으로 간 박순은 먼저 새끼 딸린 암말을 구해서 망아지는 이성계가 거처한 데서 바라다 보이는 곳에 매어두고 어미 말만 타고 갔다. 박순이 이성계를 만나 환궁을 설득하고 있는데 서로 보이는 곳에 매어있던 망아지와 어미 말이 시끄럽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성계가 그 까닭을 묻자 박순은 지각없는 동물들도 어미와 새끼가 서로 그리워 울부짖는다며 아들인 태종 이방원의 심정을 헤아려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박순의 계략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나 보다. 박순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이성계는 돌아가라고 허락하면서(야사에는 다른 차사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전함)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닭이 울기 전에 이곳을 떠나, 내일 오전 중으로 빨리 영흥 용흥강을 지나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누구도 박순이 무사히 한양으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니 말이다. 이성계의 부하들은 박순을 죽이자고 청했으나 이성계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하들의 거듭되는 간청을 외면할 수 없었던 이성계는 박순이 영흥땅을 지났을 시간에 박순을 죽이라고 허락하면서 용흥강을 지났으면 죽이지 말고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이성계 부하들이 영흥강에 이르렀을 때 박순은 막 배에 오르려던 참이었다. 결국 박순은 이성계 부하들에게 뱃전에서 끌려내려와 죽고만다. 부하들은 이성계에게 박순이 죽으면서 했던 말을 전했는데 박순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신은 비록 죽지만, 성상께서는 식언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신들을 죽인 이성계였지만 이 상황에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성계는 박순의 뜻을 불쌍히 여겨 비로소 환궁에 동의했다고 한다. 나이들면 고집만 세진다더니 후세에 '함흥차사'란 무시무시한 말을 남기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다. 태조 이성계는 왜 함흥으로 낙향했을까? 아무리 아들에게 실망했로소니 수많은 사신들을 죽이면서까지 환궁을 거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그 유명한 '왕자의 난'이 등장한다. 2000년 현대그룹 경영권을 놓고 정몽구 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이 맞붙은 적이 있는데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왕자의 난'이란 표현을 썼는데 바로 함흥차사의 원인이 됐던 조선 초 '왕자의 난'에서 유래된 말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왕자의 난을 편의상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으로 구분하는데 '1차 왕자의 난'은 요즘 세종의 한글창제 과정을 그린 SBS 수목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조선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의 야망과도 관련이 있다.

정도전이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우면서 꿈꾸었던 국가체제는 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유교국가였다. 한편 이성계에게는 첫째 왕비인 한씨에게서 얻은 여섯 아들과 둘째 왕비인 강씨에게서 얻은 두 아들이 있었다. 특히 한씨 소생의 아들들 중 다섯째인 방원은 조선을 세울 때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아들이었다. 그러나 유교적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정도전의 견제로 개국공신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세자 책봉에서도 탈락하고 말았다. 방원은 사병마저 혁파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을 습격해 죽이고 세자 방석을 폐위해 귀양보내고 형인 방번도 함께 죽이는 형제간 전쟁 아닌 전쟁을 치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1차 왕자의 난'이다. 이 일로 실권을 잡은 조준, 하륜 등이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지만 방원은 사양하고 형인 방과를 세자로 책봉했다. 방과가 바로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다.

형제간 전쟁이 여기서 끝나버렸다면 고려에 끝까지 충성하려던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에 하여가(何如歌)로 멋지게 화답한 방원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방원이는 '2차 왕자의 난'평정하고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 되는데 '2차 왕자의 난''1차 왕자의 난'으로 공을 세우고도 일등공신에 이르지 못한 박포라는 사람이 형제들 사이에 끼여 일으킨 싸움이다. 박포는 방원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며 형 방간에게 거짓말을 해서 형제간 전쟁을 일으키는데 결국 방원이 승리하여 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자식들의 왕권 다툼으로 하루도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던 현장을 목격해야만 했던 아버지 이성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지식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손 치더라도 환궁을 설득하러 온 사신들을 꼭 죽여야만 했을지......그 아버지의 그 아들들이다. 어쨌든 함흥차사에는 섬뜩하고 살벌했던 역사의 현장이 녹아있다. 함부로 쓸 말이 아니지싶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