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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기대되는 <소나기> 작가 황순원의 미공개 초기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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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날쌔게 물만 움켜낸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대로 재미있는 양 자꾸 물만 움킨다. 어제처럼 개울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야 길을 비킬 모양이다. 그러다가 소녀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파짝 징검다리를 건너 뛰어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날라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 중에서-

소설 속 한 장면이지만 누구나 어린 시절 경험해봤음직한 애틋한 추억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채 알기도 전에 이성을 향한 관심은 마치 법칙이라도 된 듯 무관심한 척 하거나 때로는 싫어하는 척 하는 행동으로 표현하곤 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가 교과서에는 물론 드라마나 뮤지컬로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것도 누구나의 추억과 중첩되면서 눈을 지긋이 감고 턱을 괴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다르게 표현하자면 재빛 하늘과 회색 도시로 단절되어버린 순수함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작년부터 근대 단편소설들을 연재하면서 엊그제 반가운 소식이 하나 들려왔다. 보도에 따르면 <소나기> 작가 황순원의 문학세계가 형성된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미공개 초기작들이 대거 발굴되었다고 한다. 시와 소설, 수필 등을 포함해 무려 70여 편이 된다고 하니 벌써부터 소풍 전날 잠을 못이뤘던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다. 이번에 공개될 작품들은 존재 여부는 알고 있었으나 그동안 황순원 작가 본인이 공개를 원치 않았다고 한다. 또 발굴된 미공개 초기작들은 '제8회 황순원문학제'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황순원이 한국을 대표하는 순수문학 작가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소나기>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할머니 무릎팍 얘기는 소설 <별>로 승화되어 대표적인 성장소설이 되었다. 죽은 엄마를 그리워하던 사내아이, 죽은 엄마가 누이를 닮았다는 동네 어른들의 말에 누이를 보면서 엄마를 그려보지만 큰 입술 사이로 검은 잇몸이 드러난 누이에게서 예쁜 엄마의 얼굴을 상상할 수가 없다. 심지어 사내아이는 누나가 죽었으면 한다. 그러나 시집간 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애써 외면해 보지만 사내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보는 것은 두 개의 별이다. 엄마별과 누이별. 이번에 발굴된 초기작 중에는 소설 <별>을 떠올리게 하는 시도 있다고 한다. 다음은 언론에 공개된 황순원 최초의 시인 <누나 생각>으로 1931년 매일신보에 실린 작품이라고 한다.

황천간 우리 누나/그리운 누나/비나리는 밤이면/더욱 그립죠.
그리운 누나 얼굴/생각날 때면/창밧게 비소리도/설게 들니오.


한편 황순원은 월남 작가라는 독특한 이력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작품세계를 보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월남작가들이 반공적 성향을 보이지만 황순원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의 사상탄압이 극심하던 일제 강점기 말기에도 소설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해방 후 북쪽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발해 월남을 하게 된다. 그러나 월남 후 그의 작품들은 예상과 달리 좌익적 성향을 드러냈다고 한다. 창비상에서 펴낸 <21세기 한국소설> '황순원' 편에는 그의 월남 후 작품 세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월남 이후 해방공간의 서울에서 그가 보여준 행적입니다. 월남한 지주 출신의 지식인들이 대부분 반공적 성향을 보이며 우익측의 이념적 대변자로 활약한 데 반해 황순원은 오히려 좌익적 성향을 드러내는 소설들을 발표했습니다. 그 때문에 1949년 11월 당국에 자수하여 이른바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수모를 겪고 작가적 생명은 물론 육체적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이후 남한에서의 그의 삶과 문학에는 늘 어떤 강박관념에 짓눌린 흔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의식한 자기 검열 탓이지요.

이런 황순원의 작품세계는 <목넘이마을의 개>나 <학>, <검부러기>, <이리>, <독 짓는 늙은이> 등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때로는 동화적 상상력으로 반공이데올로기를 무력화시키기도 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의 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특히 <독 짓는 늙은이>에서는 그가 월남 후 줄곧 그를 괴롭혀왔던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박관념을 장인정신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털어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시류에 편승에 일희일비하는 삶보다는 자신이 그동안 지켜왔던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연속성에 무게를 두웠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어느 신문의 표현대로 국민소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의 이번 미공개 초기작 발굴은 그의 작품세계를 보다 폭넓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황순원 미공개 초기작 발굴을 주도한 경희대 국문과 김종희 교수가 언론에 소개한 황순원의 산문 <말과 삶과 자유>라는 글의 내용 중 일부는 작가 황순원의 작품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한다. 

나는 판을 달리할 적마다 작품을 손봐 오는 편이지만, 해방 전 신문 잡지에 발표된 많은 시의 거의 다를 이번 전집에서도 빼버렸고, 이미 출간된 시집 <방가>(放歌)에서도 27 편 중 12편이나 빼버렸다. 무엇보다도 쓴 사람 자신의 마음에 너무 들지 않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읽힌다는 건 용납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빼버리는 데 조그만치도 미련은 없었다. 이렇게 내가 버린 작품들을 이후에 어느 호사가가 있어 발굴이라는 명목으로든 뭐로든 끄집어내지 말기를 바란다. -황순원의 산문 <말과 삶과 자유> 중에서-zgrj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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