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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DJ의 노벨상은 내세울만한 문화콘텐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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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진흥위원회 전 위원장이었던 조희문 교수가 '영화계 좌파 장악'을 주장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조희문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우파 정권이라 믿었던 이명박 정부가 3년을 넘기고 있지만 문화예술계는 좌파가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며 우파의 이념적 공유, 조직, 실행은 상대적으로 느슨하거나 무력한 수준이라고 했다. 편가르기를 무슨 평생의 업인양 눈만 뜨면 떠들어대는 그들인지라 콧방귀 한번 뀌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한 축을 담당했던 수장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양성을 먹고사는 문화예술이기에 더욱 그렇다. 

최근 드골 공항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국 아이돌 스타들의 프랑스 입성이 화제가 되고 있다. 마치 1980년대 '홍콩 느와르'를 연상시키듯 '한류'로 대표되는 문화예술은 대한민국 국가 브랜드 제고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예술의 한 축인 책도 마찬가지다. 작년 고은 시인의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제기되었을 때 온 국민이 가슴으로 응원했던 이유도 그 상의 가치가 단순히 개인의 문학적 성과와 영광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은 시인과 고은 시인의 시를 바라보는 개인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국가적 경사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조희문 교수의 발언 일주일 후 또다시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선을 목격했다. 이번 사건의 장본인 또한 문화예술 관계자라는 점에서 낯선 음식이 위장 벽을 타고 흐르는 씁쓸한 뒷맛을 경험해야만 했다. 


문화관광부 산하 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의 김주연 원장은 한국 책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번역원에서 계간으로 발행하는 ‘리스트 북스 프롬 코리아’(list_Books from Korea)에 실릴 예정이었던 <김대중 자서전>을 정치인의 책이라는 이유로 게재하지 말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원래 2010년 겨울호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김대중 자서전>을 추천했던 편집자문위원들도 ‘리스트 북스 프롬 코리아’(list_Books from Korea) 2010년 겨울호가 발간되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에 자문위원들이 김주연 원장에게 항의했고 결국 2011년 봄호에 표지 사진없이 소개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편집권이 번역원에 있다지만 이 책을 추천한 편집자문위원들도 모르게 그것도 인쇄 직전에 삭제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또 수많은 정치인들이 책을 내는 상황에서 정치인 책을 소개하면 계속 부탁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김주연 원장의 말도 번역원의 목적을 망각한 발언으로 보인다. 한국문학번역원이라는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문화콘텐츠의 번역이 중요한 사업내용 중 하나이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문화번역원'으로의 개명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업내용을 볼 때 <김대중 자서전>을 단순한 정치인의 책으로 치부하는 김주연 원장의 태도에서 오히려 정치색이 더 짙게 묻어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소회는 아닐 것이다.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다. 또한 대한민국의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에 쓴 인생역정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단순한 특정 정치인의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김대중 자서전>이 당연히 외국에 소개해야 할 대한민국의 문화콘텐츠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아공 월드컵이 있기 전 우리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만델라를 통해 남아공이 지구본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았다. 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를 통해 버마(공식 국가명인 미얀마는 정통성 없는 버마 군부의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라 이렇게 표기한다)의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마찬가지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파리똥보다도 작게 지구본 귀퉁이에 한 점 찍혀 있던 대한민국을 많은 세계인들이 그 존재감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게다가 김대중 전대통령은 현직 정치인이 아닐뿐더러 이미 고인이 된 몸이다. 김주연 원장의 해명은 현정부 문화단체장들의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아닌게 아니라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사상검증은 일제강점기 문학인들에 대한 사상탄압보다 더 악랄하게 진행되어 왔다. 다양성이 생명인 문화예술을 정치적으로 재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조희문 교수가 이창동 감독이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내며 좌파 문화정책을 주무했던 경력이나 봉준호 감독이 민노당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목소리를 찾기 힘들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고 하는데 이게 왜 비판대상이 되는지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모르고 있는 현정부 문화정책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쓸쓸할 뿐이다.

정치적 잣대로 세상의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이들에게서 '한류'의 생명력이 얼마나 길게 지속될지 의문이다. 세상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보다보면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전 한 닢 던져주는 따뜻한 마음씨도 다 좌파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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