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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그리스

폴레모스가 후브리스와 결혼하면 생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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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서 폴레모스(Polemos. ‘전쟁’이라는 뜻)는 전쟁을 의인화한 또는 구체화한 악마였다. 그와 관련된 어떤 숭배 관습이나 신화도 없으며 추상적인 표현으로서 그는 주로 우화와 철학적 담론에 등장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폴레모스를 벨룸(Bellum)이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핀다로스(Pindar. 기원전 518년~기원전 438년)는 폴레모스가 (전쟁 중에 공격이나 돌격 때 지르는) 함성의 여신 알랄라(Alala)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기원후 4세기경에 활동한 그리스 시인 퀸토스 스미르나이오스(Quintus Smyrnaeus)에 따르면 폴레모스는 전쟁의 여신 에니오(Enyo)의 형제였다. 전쟁과 전장을 의인화한 또 다른 그리스 신으로는 아레스(Ares), 에리스(Eris), 마카이(Makhai), 히스미나이(Hysminai), 안드로크타시아이(Androktasiai), 포노이(Phonoi), 케레스(Keres) 등이 있다.

 

폴레모스는 전쟁을 의인화한 신이었다. 출처>구글 검색

 

이솝 우화 ‘전쟁과 그의 신부’는 폴레모스(전쟁)가 어떻게 후브리스(Hubris. 무례한 오만)를 그의 아내로 삼을 수 있었는지 말하고 있다. 폴레모스는 후브리스를 너무 좋아해서 이제 둘은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 우화 모음집(이 중 상당수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이솝 우화로 알려져 있다)의 저자 바브리우스(Babrius. 헬레니즘화된 로마인.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됨)는 군중의 호의를 얻기 위해 국가나 인간의 도시 사이에 무례한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 후에 곧 전쟁이 임박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기원전 446년~기원전 386년. 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의 희극 <아카르나이의 사람들>에서는 폴레모스가 포도원을 태우고 포도주를 비우고 노래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연회 참석이 금지되었다. 그는 평화를 추구하고 화해와 결혼을 갈망하는 디카이오폴리스(Dicaeopolis)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생명력의 신 디오니소스는 폴레모스를 위해 자신을 무시한 군인 라마코스에게 덩굴 말뚝을 무기로 사용하여 상처를 입혔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전반적으로 폴리스의 이익에 부합하므로 디오니소스와 폴레모스 사이의 균형을 옹호했다. 그 균형은 때로는 평화로 때로는 전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폴레모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평화에 대한 프롤로그 마지막 부분에 간략한 연설을 한다. 투물트(Tumult. 또는 키도이모스. 흥분한 군중이 내는 함성)를 부하로 삼아 그는 동굴의 돌 밑에 평화를 묻었다. 이제 그는 연설을 통해 그리스의 모든 도시를 10년 동안 괴롭히던 절구에 맷돌로 갈아버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도시 이름에 대한 일련의 말장난은 그의 무시무시한 위협을 약화시켜 마치 그가 잔치 음식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임무에 충분한 절굿공이를 얻기 위해 투물트를 보낸 후 그는 제우스의 집으로 물러나 다시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잠재적 복귀는 연극 전반에 걸쳐 위협이 된다. 이 희극은 아리스토파네스가 독창적으로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기원전 535년~기원전 475년)는 폴레모스를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고 전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의 왕이자 아버지’로 묘사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폴레모스는 한편으로는 신을 한편으로는 인간으로 등장하며 한편으로는 노예를 만들고 한편으로는 자유인을 만든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폴레모스를 전쟁을 의인화한 신으로 생각했는지 전쟁 자체로 생각했는지 불분명하다. 이러한 모호함은 아마도 의도적일 수도 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년~1976년)는 헤라클리토스의 폴레모스를 차별화 또는 분리의 원리로 해석했다.<출처: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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