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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마야

타투(이스트)의 신 아카트와 고대 마야의 문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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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트(Acat)는 문신을 새기는 과정과 관련된 마야의 신이었다. 마야인들은 신의 형상을 한 문신을 새기면 그 신의 힘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문신 새기는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예술 형태의 중요성과 어려움 때문에 그것을 상징하는 신이 있다는 것은 당연했다. 아카트는 먹물, 바늘, 작업 공간, 더 나은 결과를 위한 타투이스트의 손 등을 축복했다. 아카트는 영국의 메소아메리카 고고학자 톰슨(J. Eric S. Thompson, 1898~1975)이 쓴 <마야의 문신과 난절법>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톰슨은 또한 아카트(Acat)가 ‘갈대’를 뜻하는 나와틀족(멕시코 남부와 중미 일부 지방의 원주민)의 요일 이름인 반면 비슷한 발음의 아카트(Ah Cat)는 ‘저장 단지의 그’라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아마도 속이 빈 갈대로 문신을 새겼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톰슨에 따르면 멕시코의 문헌학자 후안 피오 페레즈(Juan Pio Perez, 1798~1859)가 펴낸 마야어 사전에서 아카트는 ‘잉크 스탠드’라는 뜻이고 마야 상형문자 사전에서 아카트는 ‘의사의 수술도구 상자’ 또는 ‘서기관의 필통’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아카트는 또 자궁에서의 태아의 발달과도 관련이 있다.

 

 

요즘은 ‘타투(Tattoo)’라는 이름으로 더 대중화된 문신은 유럽에서 5천년 전부터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지만 이것조차 크게 과소평가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오늘날 사람들은 주로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문신을 하지만 고대 마야인들에게 문신은 피와 희생, 권력에 관한 전부였다. 그들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마야의 문신 문화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정보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긴 문헌을 기초로 하고 있다. 디에고 데 란다(Diego de Landa, 1524~1579) 주교의 책 <정복 전후의 유카탄>에 따르면 마야인들은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을 매우 용감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심지어 문신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조롱도 팽배했다고 한다.

 

마야 문신이 오늘날 문신을 새기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많은 위험을 안고 있었다. 고대 마야인들은 오늘날의 바늘 대신 갈대를 사용해 문신을 새겼다. 이것이 유발했을 고통과 함께 감염 위험의 증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신이 생명을 위협하는 경험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문신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낙인은 당시 사회적 기준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고대 마야인들에게 문신은 미적 행위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 그 이상이었다. 그들에게 문신은 믿음을 증명하는 행위였다. 문신이나 피어싱 등 신체 개조는 마야인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오늘날의 기준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점점 더 극단적이 되었다. 아기의 머리를 천으로 단단히 감싸거나 머리 뒤쪽에 판자를 대고 묶는 방식으로 모양을 길어지게 만들었다. 수많은 피어싱도 장려되었고 치아를 빼고 그 자리에 보석을 박기도 했다. 이보다 더 극단적인 형태의 문신도 자주 실행되었다. ‘스카리피케이션’으로 알려진 이 방법은 피부에 일종의 흉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고대 마야인들의 표준적인 문신 형태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어느 쪽이든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그 과정을 겪는 개인에게는 큰 희생이 필요했다. 마야의 신념 체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복잡했는데 앞서 언급한 란다 주교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해독이 더 어려워졌다. 디에고 데 란다 주교는 우상 숭배에 반대한다며 마야의 문자와 종교, 문화 등에 관한 수 백 권의 책을 불태웠다. 그 중에서도 마야 신화에 관한 책이 많았다. 고대 마야인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면 250명이 넘는 신들에게 피를 공급해야 한다고 믿었다. 대개는 희생 제의가 있었지만 문신과 스카리피케이션도 이런 문화와 관련이 있었다. 문신을 새길 때 흘리는 피를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마야인들은 심지어 문신과 스카리피케이션의 신인 아카트를 창조했다. 아카트라는 이름의 정확한 의미와 외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피부에 문신을 새길 때 쓰는 ‘갈대’를 의미한다고 믿었다. 일반적으로 부유하고 힘센 남성들에게만 문신이 허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야인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평등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문신이 허용되었고 결혼 후에는 신체의 여러 부분에 문신을 추가로 새겼다. 이는 마야인들에게 문신이 얼마나 흔한 문화였는지 그리고 그들의 문화에 얼마나 뿌리내려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의 정복 전쟁 과정에서 문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511년 스페인 함대가 유카탄 반도(멕시코 남동부에 위치)에 도착했을 때 군인 곤잘로 게레로(Gonzalo Guerrero, 1470~1536)와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헤르니모 데 아길라르(Geronimo de Aguilar, 1489~1531)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마야인들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인신공양의 희생양이 되었다. 마야인들은 이 두 사람에게 죄수의 문신을 새겼다. 얼마 후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Hernan Cortes, 1485~1547)가 상륙하고 포로들이 스페인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게레로는 남기로 결정하고 마야인들과 함께 스페인에 맞서 싸우겠다고 했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문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혼해서 세 자녀가 있었던 게레로는 얼굴에 문신을 하고 귀에는 피어싱까지 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자신의 이런 모습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야인들이 문신을 할 때 천체에서 꽃과 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미지와 도상학으로 장식했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과정과 관련된 희생과 고통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그들의 세계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야 문신의 전통은 거의 사라졌지만 문신은 유카탄 반도를 넘어 전 세계에 그들과는 다른 개념의 문신 또는 타투 문화가 유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들이 잊혀졌지만 타투이스트의 신 아카트만은 오히려 현대 문화의 한복판으로 진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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