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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로마

고대 로마의 갓 결혼한 어린 신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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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라레스Lares(가정의 수호신들, 라르Lar의 복수형) 숭배는 마네스Manes(지하세계의 신들) 숭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둘 다 그리스의 영웅 숭배와 유사했다. ‘라르Lar’라는 이름은 에트루리리아어로 ‘영주’, ‘왕’, ‘영웅’ 등을 의미한다. 라레스는 가정의 라레스와 공공의 라레스 두 부류로 나뉘는데 전자는 영웅의 품격에 걸맞게 양육된 가정의 마네스였다. 그 집이 죽은 자들이 묻힌 곳이었다면 마네스와 라레스는 거의 동일했을 것이다. 마네스가 묻힌 장소와 관련이 있었다면 라레스는 화로와 가정의 모든 일들을 주재하는 신들이었다. 모든 죽은 자의 영혼이 라레스로 추앙된 것이 아니라 오직 선량한 자의 영혼만을 라레스로 숭배했다.

 

 

여성의 영혼이 라레스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활약했던 고대 라틴 작가 풀젠티우스는 아기가 태어나 40일 이전에 죽으면 라레스가 될 수 있다고 추론했다. 모든 가정의 라레스는 라르 파밀리아리스가 이끌었는데 라르 파밀리아리스는 가문의 시조로 여겨졌다. 즉 라르 파밀리아리스는 가족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가족의 거처가 바뀌었을 때 그들과 함께 이동했다.

 

공공의 라레스는 로마의 정치가인 플리니(Gaius Plinius Secundus, 23년~79년)에 의해 가정의 라레스나 개인적인 라레스와 구별되며그들은 로마 뿐만 아니라 로마의 법률로 통치된 모든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공공의 라레스 중 라레스 프라이스티테스와 라레스 콤피탈레스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데 둘은 실제로는 같은 존재이며 숭배 장소만 다를 뿐이다. 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라레스 숭배를 제도화했다.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기원전 63년~기원후 14년) 황제의 개혁 당시 그는 공공의 라레스에 대한 숭배를 새로 만들었다. 그들의 이름인 라레스 프라이스티테스는 로마의 수호신으로 고대 로마의 주요 도로인 비아 사크라의 가장 윗부분 즉 콤피티움(교차로) 근처에 신전을 두었는데 그 당시에는 콤피탈레스로 불렸다.

 

이 신전(사켈룸 라룸 또는 아이데스 라룸)은 두 개의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는데 아마도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모습일 것이고 그들 앞에 개의 석상이 서 있었는데 이는 경계심을 상징하기 위해서가나 개가 라레스에게 바쳐진 가장 일반적인 제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레스가 도시 전체의 수호신이었지만 라레스 콤피탈레스는 도시의 여러 구역을 주재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구역 또는 구획은 두 개 이상의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라레스에게 바쳐진 작은 신전이 세워졌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의 두 번째 건설자로 인식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게니우스 아우구스티(가족의 정령들)가 라레스 프라이스티테스(가문의 정령들)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라레스 프라이스티테스와 라레스 콤피탈레스 외에도 몇몇 라레스가 대중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즉 시골에서 숭배된 라레스 루랄레스는 한 때 공화국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던 특정 영웅들에서 기원했다. 라레스 아르발레스는 같은 계급에 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여행자들은 라레스 비알레스를 숭배했고 해전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라레스 마리니 또는 라레스 페르마리니에게 신전이 봉헌되었다.

 

라레스 숭배는 부분적으로는 공적인 것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사적인 것이었다. 페나테스Penates와 같은 가정의 라레스는 로마 가정의 종교적 요소를 형성했다. 라레스 숭배는 페나테스와 마네스 숭배와 함께 사크라 프리바타(신성불가침 장소)를 형성했다. 대저택에 있는 라레스 동상은 보통 아이디쿨라이 또는 라라리아라고 불리는 별도의 장소에 보관되었다. 그들의 숭배는 단순했으며 시기적으로는 초기에 장소적으로는 시골에서 특히 그랬다. 라레스에게 무릎을 꿇고 제물을 바쳤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파텔라리이라고 불렀다. 독실한 사람들은 매일 제물을 바쳤다. 결혼해 신랑의 집에 들어간 어린 신부의 첫 번째 일이 바로 라레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라레스는 짧은 튜닉과 샌들을 신고 춤을 추는 젊은이들로 그려졌다. 한 손에는 뿔 모양의 컵을 들고 다른 손에는 그릇을 들고 있다. 가장 흔한 것은 청동상과 벽화였다. 라레스 숭배를 재편한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 기원전 100년~기원전 59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아버지) 황제는 토가를 입은 이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묘사된 황제의 수호신은 두 라레스 사이에서 숭배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마찬가지로 많은 가정에서 죽은 가장의 ‘게니우스’(출생과 죽음을 관장하는 수호신)는 폼페이우스의 카사데이 베티의 라라리움(고대 로마의 집안에 있었던 가정의 수호신을 모신 사당)에서와 같이 두 라레스 사이에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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