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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이집트

오시리스(Osiris), 나일강의 번영을 보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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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세계의 신 오시리스(Osiris). 출처>구글 검색

오시리스(Osiris)는 죽음과 지하세계, 사후세계의 신으로 이집트 신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신이다. 그는 보통 녹색 피부에 파라오와 관련이 있는 턱수염을 하고 큰 깃털과 원뿔형 왕관을 쓰고 있으며 한 쪽 다리는 미라처럼 아마포에 쌓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손에는 갈고리와 도리깨를 들고 있다.

 

오시리스는 그리스식 이름이다. 이집트 상형문자로는 ‘Wsjr’로 표기된다. 어떤 이집트 학자들은 오시리스의 이름으로 Aser, Ausar, Asar, Asari, Ausir, Ausare, Usire, Usir, Wser, Wesir 등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모두 ‘전지전능한’, ‘강력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오시리스가 고대 이집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인식되었고 수 천년 동안 오시리스를 위한 다양한 숭배와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양치기 신으로도 숭배 받았다. 고고학자들은 이 주장의 증거로 오시리스를 묘사한 그림에서 양치기들이 사용하는 갈고리를 들고 있는 모습을 제시했다.

 

오시리스는 이집트 제1왕조 때인 BC 3100년경부터 숭배되기 시작했지만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때는 이집트 제5왕조(BC 2498~BC 2345)때였다. 이후에도 오시리스에 관한 언급은 이집트 문서와 샤바카 스톤(Shabaka Stone),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에도 등장한다. 오시리스는 ‘무통의 제왕’, ‘가장 서쪽에 있는 자’ 등으로 불렸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이 죽음을 해가 지는 서쪽이나 고통이 없는 세상으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시리스는 사후세계의 심판자였으며 비옥한 나일강 범람의 신이었으며 곡물 또는 식물의 신이기도 했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오시리스는 침묵의 신이자 사랑과 젊음의 신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집트 문서에 등장한 오시리스는 녹색이나 검은 피부를 갖고 있다. 녹색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재생이나 부활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있으며 검정색은 풍요와 관련이 있다. 특히 검정색은 이집트의 번영에 큰 역할을 했던 나일강이 범람할 때 평야 지대에 펼쳐진 검은 흙과 부의 상징이었다. 드문 사례이긴 하지만 오시리스는 달 렌더링을 포함한 왕관을 쓰고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그가 달이나 밤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오시리스는 대지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신 누트(Nut) 사이에서 태어난 네 명의 자식 중에 한 명이다. 그의 가계도에 따르면 오시리스는 가장 유명한 이집트 신 중에 하나인 태양신 라(Ra)의 큰 손자에 해당하는데 오시리스의 네 명의 동생들 즉 남동생 세트(Seth)와 두 명의 여동생 이시스(Isis), 네프티스(Nephthys)도 신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게브와 누트의 첫 번째 자식으로써 오시리스는 이집트 왕관을 물려받았다. 세트는 네프티스와, 오시리스는 이시스와 각각 결혼했다.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결혼은 가장 강력한 힘의 결합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들의 결혼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한 때 네프티스는 마법을 부려 언니 이시스와 똑같은 외모를 하고 오시리스 앞에 나타났다. 이를 알지 못했던 오시리스는 네프티스의 유혹에 결국 동침을 했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그가 바로 아누비스(Anubis)였다. 이 사건 이후 세트는 오시리스에 대한 복수를 전개했는데 아마도 오시리스의 왕권을 노렸거나 아내를 임신시킨 것에 대한 보복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세트는 오시리스를 관으로 유인해 나일강에서 익사시켜 죽였다. 이 사건은 나일강의 범람을 설명하는 신화가 되었다.

 

이시스는 간신히 남편의 시체를 되찾았다. 그러나 세트는 다시 오시리스의 시체를 훔쳐 달아났다. 세트는 시신을 토막 낸 후 이집트 이곳 저곳에 그 조각들을 숨겼다. 이시스는 훼손된 남편의 신체 부위를 찾기 위해 몇 년을 헤매고 다녔다. 그녀는 마침내 훼손된 시신의 조각들을 모두 찾았고 마법의 힘으로 남편을 부활시켰다.

 

이시스는 부활한 오시리스에 의해 임신되었고 아들 호루스(Horus)를 낳았다. 오시리스는 다시 한 번 죽었고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오시리스가 지하세계로 내려갔을 때 그의 아들 아누비스는 지하세계의 신으로써 몇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은 자들의 영혼을 판단하는 일은 오로지 오시리스의 몫이 되었다.

 

이집트의 죽은 왕들은 오시리스와 함께 일어나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었다. 오시리스가 죽은 후의 새로운 삶에 책임이 있다는 이 믿음은 그를 새해와 자연의 순환에 연결시켰다. 오시리스 숭배는 이집트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이집트 종교를 탄압하고 기독교 부흥에 심혈을 쏟고 있었다. 이집트 종교에 대한 로마의 끊질긴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사람들의 내면에는 여전히 오시리스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집트인들에게 세트에 의해 살해된 후 오시리스가 부활한 사건은 악을 물리친 후의 선에 대한 새로운 시작으로 인식되었다. 또 매일 밤 죽은 자의 세계로 들어가 새로운 날과 함께 태어나는 태양으로 상징되었다. 이와 같이 오시리스는 저승이자 저승의 왕이었으며 삶과 죽음, 부활을 관장하는 창조 신으로 인식되었다.

 

이집트 신화를 처음 접해본 독자들도 이 이야기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시리스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아누비스, 암무트, 헤네페르, 마아트, 오시리스 등이 지하세계에서 죽은 자들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죽은 자들은 심장의 무게를 측정해 깃털보다 가벼우면 이승에서의 삶이 진실되었다고 생각하고 낙원으로 보내진다고 믿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오시리스 숭배는 그들의 일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은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을 의미했다. 나일강의 범람은 이집트인들 생존의 토대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는 당시 가장 부유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이집트인들은 이것의 상당 부분을 오시리스 덕으로 돌렸다. 또 오시리스의 이름과 행동, 속성 등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의식들이 행해졌다.

 

이집트 첫 번째 왕으로 보이는 그의 상징은 나팔과 양치기의 지팡이였다. 한편 나팔과 지팡이는 파라오들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통치는 후대 이집트 통치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를 찬양하면 나일 강둑에서 영원히 번영과 풍성한 수확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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