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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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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여자의 애인이 되어주고픈 남자 [20세기 한국소설] 중 이태준의 『까마귀』/「조광」3호(1936.1)/창비사 펴냄 호상(好喪)이란 말이 있다.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말이다. 요즘에는 고통없이 생을 마감하는 죽음에도 호상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오래 살면서 고통없이 죽는다는 것은 인간이 지상에서 열망하는 마지막 바램인지도 모른다. 또 인간은 사후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꿈을 꾸기도 한다. 간혹 사후세계를 경험했다는 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 뒤에 오는 세상은 꽃과 빛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죽음도 아름다워야 할 것이다. 정말 그럴까? 세상에 아름다운 죽음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이태준의 『까마귀』는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서 찾고자 한다. 그래서인지 ..
"노랑수건, 네가 강자(强者)다" [20세기 한국소설] 중 이태준의 『달밤』/「중앙」1호(1933.11)/창비사 펴냄 강자가 살아남는다 하고 살아남는 놈이 강자라 한다. 인간이란 참 간사하다. ‘호모○○○’, ‘호모○○○’, ‘호모○○○’ 라는 난해한 말을 만들어 동물과 구분하려 들면서 정작 동물들의 세계인 ‘약육강식(弱肉强食)’을 진리인양 떠받들고 산다. 도대체 강자란 누구이며 어떤 놈이 살아남는단 말인가! 권력과 돈을 가진 자?, 뛰어난 머리와 빠른 발을 가진 자? 아니다. 약삭빠른 자가 강자다. 살아남는 자가 강자라면 분명 쥐처럼 약삭빠른 자가 강자임에 틀림없다. 약자가 만들어준 강자의 세상. 꼴찌에게 보내는 박수는 강자의 거만함인지도 모른다. 이태준의 소설 『달밤』의 주인공 황수건은 빡빡 깎은 머리지만 보통 크다는 정도 이상으로 ..
MB만 비껴간 코미디 풍자, 과연 바람직한가 20세기 한국소설05/창비사 1980년대 KBS 코미디 프로그램 [유머 일번지] 중에 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비룡 그룹 임원 회의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기본 설정으로 한 당대 최고의 인기 코미디 프로였다. 비룡 그룹 임원회의에는 몇 명의 정형화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김회장(故김형곤), 쥐뿔도 아는 게 없지만 회장 처남이라는 이유로 자리를 버티고 있는 양이사(故양종철), 쓴소리만 해대는 그래서 늘 찬반신세인 엄이사(엄용수), 김회장 옆에서 딸랑딸랑 방울소리만 울려대는 영혼없는 김이사(김학래). 마치 도때기 시장 같은 비룡 그룹의 임원회의는 김회장이 주먹으로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잘 되야 될텐데…”라는 말과 함께 끝이 났다. 이들이 쏟아내는 웃음 보따리는 힘겨운 시대를..
뺏기지 않는 놈은 도적질할 권리도 없다 [20세기 한국소설] 중 채만식의 『명일』/「조광」12~14호(1936.10~12)/창비사 펴냄 만일 내일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무슨 색깔일까? 노란색, 파란색, 흰색…아마 검정색이나 회색으로 내일을 표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내일을 의미하는 또 다른 한자인 명일의 명 자도 ‘밝다(明)’라는 뜻이다. 새 날이 밝아온다는 직접적인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옛 사람들은 내일이 가지는 속성을 희망이고 꿈이고 기대라는 믿음으로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을지 어설픈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여기 내일을 온통 회색빛으로 채색하고 있는 지식인이 있다. 그는 소위 룸펜(Lumpen) 지식인이다. 그에게 내일은 명일(明日)이 아니라 명일(冥日)이다. 채만식의 소설 『명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발표된 『레디메이드..
현대판 장발장,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20세기 한국소설] 중 김유정의 『만무방』/「조선일보」(1935.7.17~31)/창비사 펴냄 당뇨병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물건을 훔친 아들, 아이들 분유값 때문에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남성들에게 성관계 쪽지를 보낸 뒤 차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낸 엄마, 간암 투병 중에 약값이 없어 배포용 무가지를 훔친 독거노인, 빈 건물에서 건축자재를 훔치다 붙잡힌 무직자까지 국민소득 2만불 시대 대한민국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정부고 언론이고 내일 당장이라도 선진국 반열에 오를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그 뒤안길에서는 ‘현대판 장발장’이 빵 한 개 훔치려다 철창 신세로 전락하는 생계형 범죄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범죄는 범죄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냉혹한 법의 잣대만을 들이대기에는 우리 ..
태석이 빨갱이가 된 사연 [20세기 한국소설] 중 채만식의 『도야지』/「문장」27호(1948.10)/창비사 펴냄 “1940년대의 남부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천,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주장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요, 단지 추잡한 것과 부정사악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 밖에도 XXX과 XXXX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그리고 차경석의 보천교나 전해룡의 백백교도 혹은 거기에 편입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람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도..
가출한 아내와 남편의 죽음 그리고 전쟁 바진(巴金, 1904~2005)의 장편소설 《차가운 밤》 바진(巴金, 1904~2005)은 루신, 라오서와 함께 중국의 3대 문호로 꼽힌다. 그는 무려 한 세기를 꽉 채우고도 남은 인생을 살았다. 프랑수와 미테랑 프랑스 전대통령의 “두 세기에 걸쳐 시련으로 단련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 부활의 원동력을 만들어낸 바진의 삶은 중국 그 자체이다.”라는 말처럼 바진은 중국의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이 겪었던 질곡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다. 중국이 자랑하는 문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낯선 이유가 그의 기나긴 삶 때문이라는 조금은 아이러니한 생각을 해본다. 《가》에 이어 만난 《차가운 밤》은 고전 작가로서의 바진을 더 이상 낯선 이름으로 기억해야만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기에 충분할 만큼..
두 번 결혼한 여자 [20세기 한국소설] 중 김유정의 『산골 나그네』/「제일선」11호(1933.3)/창비사 펴냄 몹쓸 병에 걸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남편과 그 남편 곁을 묵묵히 지켜주고 있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병은 더욱 깊어가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약 한재 지어 먹일 수 없는 빠듯한 살림이었으니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어쩔 수 없이 아내는 남편을 데리고 이 동네 저 동네 찾아 다니며 걸식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동네 부잣집에서 마누라를 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도 씨받이가 아니었나 싶다. 아내는 그 부잣집을 찾아가 남편을 살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첩으로라도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 부잣집에서는 근처에 남편이 기거할 수 있는 움막을 지어 주고 아내를 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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