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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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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가 애인 앞에서 줄행랑을 친 이유 [20세기 한국소설] 중 박영준의 『모범경작생』/「조선일보」(1934.1.10~1.23)/창비사 펴냄 일본 시찰에서 돌아온 길서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애인 의숙을 찾았다. 보지도 못했고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바나나를 들고 밤이 으슥할 무렵 의숙을 찾았건만 길서를 본 의숙은 얼굴을 돌리고 울기만 했다. 의숙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아는 길서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때 성두가 충혈된 얼굴로 뛰어들어왔다. 길서는 애인 의숙이 보는 앞에서 들고 있던 바나나를 쥐고는 뒷문으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남자로서, 애인으로서의 자존심까지 내팽개치고 왜 길서는 줄행랑을 쳐야만 했을까? 1934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박영준의 소설 『모범경작생』은 관주도 농촌정책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
MB만 비껴간 코미디 풍자, 과연 바람직한가 20세기 한국소설05/창비사 1980년대 KBS 코미디 프로그램 [유머 일번지] 중에 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비룡 그룹 임원 회의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기본 설정으로 한 당대 최고의 인기 코미디 프로였다. 비룡 그룹 임원회의에는 몇 명의 정형화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김회장(故김형곤), 쥐뿔도 아는 게 없지만 회장 처남이라는 이유로 자리를 버티고 있는 양이사(故양종철), 쓴소리만 해대는 그래서 늘 찬반신세인 엄이사(엄용수), 김회장 옆에서 딸랑딸랑 방울소리만 울려대는 영혼없는 김이사(김학래). 마치 도때기 시장 같은 비룡 그룹의 임원회의는 김회장이 주먹으로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잘 되야 될텐데…”라는 말과 함께 끝이 났다. 이들이 쏟아내는 웃음 보따리는 힘겨운 시대를..
뺏기지 않는 놈은 도적질할 권리도 없다 [20세기 한국소설] 중 채만식의 『명일』/「조광」12~14호(1936.10~12)/창비사 펴냄 만일 내일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무슨 색깔일까? 노란색, 파란색, 흰색…아마 검정색이나 회색으로 내일을 표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내일을 의미하는 또 다른 한자인 명일의 명 자도 ‘밝다(明)’라는 뜻이다. 새 날이 밝아온다는 직접적인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옛 사람들은 내일이 가지는 속성을 희망이고 꿈이고 기대라는 믿음으로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을지 어설픈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여기 내일을 온통 회색빛으로 채색하고 있는 지식인이 있다. 그는 소위 룸펜(Lumpen) 지식인이다. 그에게 내일은 명일(明日)이 아니라 명일(冥日)이다. 채만식의 소설 『명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발표된 『레디메이드..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 있어' [20세기 한국소설] 중 채만식의 『논 이야기』/「협동」(1946.10)/창비사 펴냄 파출소 한 켠 긴 의자에는 늘 한 남자가 자고 있다. 넥타이는 반쯤 풀어져 있고 양복 윗도리는 의자에 걸쳐져 있으며 흰색 와이셔츠는 바지 밖으로 삐져나와 추레하기 짝이 없다. 신문지로 경찰서 아니 스튜디오의 환한 조명을 가리고 자고 있는 이 남자. 그도 평범한 늑대인지라 여우의 향기에 벌떡 일어나 방청객을 향해 사자후(?)를 토해낸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방청객들은 박수를 넘어 열광적인 환호로 이 술취한 남자의 등장을 맞이해 준다. 많은 논란 끝에 폐지되었던 KBS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코너에서 박성광은 이렇게 세상을 향해 소리쳤다. 방청객들과 시청자들은 묘한 카타르..
'레디메이드 인생'으로 본 청년실업의 진실 레디메이드 인생/채만식/1934년 청년실업이 날로 심각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도 언론도 취업시즌에만 반짝 관심을 가질 뿐 강 건너 불구경이다. 200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청년 인구 중 비경제활동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56%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청년 고용률은 외환위기 당시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하는데도 진지한 공론의 장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경제활동인구의 증가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정부의 눈높이를 낮추라느니, 중소기업에는 아직도 인력이 모자란다느니 하는 청년실업대책과 이를 받아쓰기에 급급한 언론의 태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저렇게 취직만 하려고 애를 쓸게 아니야. 도회지에서 월급 생활을 하려고 할 것만이..
노동자 창선의 손바닥에는 소 우(牛)자가 찍혀 있었다 한설야의 /1929년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온 이 땅/우리의 노동으로 일떠세운 이 땅에/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저 지하 땅끝에서 하늘 꼭대기까지/우리는 쫓기고 쓰러지고 통곡하면서/온몸으로 투쟁한다 피눈물로 투쟁한다/이 땅의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박노해의 시 중에서- 박노해 시인만큼 우리 노동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개발이라는 명분 하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 그 사람들을 유혹하는 공단의 불빛, 산업역군이라는 권력과 자본의 달콤한 말에 하루가 멀다 하고 강행하는 잔업과 철야, 잘도 도는 미싱에 벌집이 돼버린 손가락, 그러나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건 개 돼지만도 못한 처참한 생활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름시름 앓다가 차가운 쪽방 한 켠에서 맞이하는 죽음…’얼굴없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3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殿)하는 프로메테우스. - 윤동주의 [간] - 저항시인 윤동주와 목에 맷돌을 달고 있는 프로메테우스가 오버랩되는 시다. 프로메테우스는 압제에 저항하는 의지의 상징이다. 그리스 신화를 읽어본 독자라면 윤동주가 그의 시에 프로메테우스를 끌어들인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어떻게 저항의 상징이 되었을까?. 그리고 프로..
인간성 상실의 막장 드라마, 낙인찍기 한국사회처럼 '낙인찍기'가 성행하고 위력을 발휘하는 국가가 있을까 싶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체제가 해체된지 20년이 되어가지만 '좌파', '좌빨'이라는 낙인찍기는 여전히 정치적인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다. 특정지역에 대한 조장된 이미지를 활용한 지역감정 조장도 낙인찍기의 또다른 형태로 볼 수 있다. 낙인찍기는 집단린치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낙인찍기의 심각성은 단순히 개인 대 개인, 집단 대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이전투구이기 전에 권력과 언론이 부추기고 조장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작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사건에서 권력과 언론이 자행했던 낙인찍기의 몰인간성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낙인찍기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미국 유명 소설가, [큰바위 얼굴]의 저자, 너새니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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