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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나는 왜 바보상자가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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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시청하는 게 아이의 뇌 발달과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보고가 있다. 아이들이 언어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쌍방향의 의사소통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쌍방향 의사소통이 아니고 일방적인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언어가 발달하지 않는다. 나에게만 의존하다 보면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에서 서툴러질 수 있다.

 

게다가 나는 화면 전환이 너무 빠르다. 채널을 돌릴까봐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빠른 화면 전환은 아이들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어리둥절하게끔 하는 충격을 줌으로써 지능 발달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내용을 무조건 학습하는 나쁜 점도 있다. 아이들은 자신이 본 것을 무조건 따라 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안 좋은 장면을 마음껏 보여주기 때문에 위험하다. 게다가 폭력 장면이 많다. 아이들은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나한테서 나오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을 끊임없이 보게 되면 아이가 성장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으므로 조심하는 게 좋다. 나를 너무 많이 시청한 일부 아이들은 행동발달장애를 겪기도 한다.

 

나한테 나오는 전자파도 아이들 건강에 굉장히 좋지 않다. 근육 기능과 운동 능력도 저하된다고 한다. 2~4살 때의 나를 보는 습관이 아이들의 허리 둘레 사이즈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이 얼마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지를 살피면 몇 년 후 허리 둘레 사이즈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결과가 있다. 캐나다 몬트리얼 대학에서 1,314명의 아이들을 연구한 결과 2~4세 아이들이 일주일에 나를 한 시간 더 시청할 때마다 허리 사이즈가 0.5밀리미터씩 굵어진다고 밝혔다. 몬트리얼 대학의 린다 파가니 박사는 나를 시청하면 교육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을 할 시간을 빼앗기 때문에 아이들의 건가을 해치게 된다고 말했다. 미국 소아학회에서는 두 살 이상 어린이들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을 하루 두 시간 이내로 권장하고 있다. 

 

▲사진>아시아경제

 

특히 광고는 소비 욕망과 물질주의를 조장한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 '이 차를 사면 당신은 성공한 인생이다.', '부자 되세요.' 이런 광고는 돈을 벌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걸 주입시킨다. 텔레비전 속의 삶의 모습과 자기를 비교하도록 하고, 그렇게 못 사는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존감이 땅에 떨어진다. 나 때문에 오는 폐해를 더 나열하자며 다음과 같다. 연예인 지망생이 된다. 예뻐지려고 무슨 수술이라도 한다. 경쟁 지옥에 빠진다. 학벌주의와 영어 숭배에 빠진다. 시민 의식이 마비된다.

 

나는 언제나 그 시대 대중의 평균적인 생각만을 표현하게 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은 대중의 기대를 앞설 수 없고 그래서 결국 그에 맞는 대중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사건이 터지면 가끔 논평이 나오지만 치열하게 성찰해서 쓴 글쓰기와 달리 깊이 있는 논평은 나오지 않는다. 대체로 나에게서 나오는 논평이란 대체로 몇 마디 말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말이란 한계 때문에도 심층적인 분석을 내보내기 힘들다. 참여정부 때부터 한미FTA란 심각한 불평등 협정이 불거져 있는데, 그 기간 동안 나를 시청한 사람들 중에 쇠고기 문제나 자동차 무역 문제 이상으로 한미FTA의 내용을 이해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출처>『작은책』7월호 '기획특집·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들|텔레비전' 중에서-

 


 

'나'는 '텔레비전'이다. '멀리(tele)' 있는 것도 가까이 '볼(vision)' 수 있기 때문에 텔레비전이다.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 열리고 있는 월드컵을 안방에서 실시간으로 보는 시대다. 텔레비전이 없었다면 그들만의 축제로 끝났을 것이지만 텔레비전이 있어 진정한 의미의 '지구촌 축제'가 될 수 있었다. 

 

▲스마트 TV. 사진>아이데일리 

 

TV만큼 쉽게 즐길 수 있는 여가 생활도 없다. 돈 들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여가 활동이다. TV 속에는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릴만큼의 유쾌·통쾌·상쾌한 일들이 벌어진다. 집에 들어가면 의미없이 TV를 켜는 사람도 있다. 마약이나 담배, 술만 중독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TV가 주는 희열도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있다.

 

TV는 기쁨의 환각만 주는 게 아니다. TV는 정보의 보고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이 조그만 네모 상자 안에 다 들어있다. 차고 넘치는 정보의 홍수는 화수분과도 같다. 정보만 주는 게 아니다. 이제는 교육도 특정 장소의 전유물이 아니다. TV만 있으면 못할 공부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TV를 통해 여가 생활도 즐기고, 지식과 정보와 교육의 기회를 얻고 있지만 '바보 상자'라는 말로 폄하하기 일쑤다. '나'는 '바보 상자'다. 즉 'TV'는 '바보 상자'다. 하지만 '바보 상자'의 주체는 'TV'가 아니다. 정확하게 풀이하면 'TV'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상자'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도 TV는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지 못했다. 시청자의 알 권리보다는 권력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니 잘못된 정보만 남발했다. 또 권력은 유병언과 구원파를 내세워 그들의 무능과 무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TV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보다는 '세월호 참사=유병언'이라는 공식을 만들기 위해 이미 언론 윤리는 포기한 지 오래다. 어느덧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는 유병언 때문'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됐다.

 

텔레비전이 생긴 이래로 권력은 끊임없이 TV를 그들의  정치 선전 도구로 이용해 왔고 그러한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TV가 주는 재미마저 권력과 자본에 의해 조작되거나 확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권력과 자본은 텔레비전을 이용해 국민과 소비자를 '바보' 로 만들기 위한 음모를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속성상 결코 멈출 수 없는 질주다. 시청자들의 '보는 능력'이 요구되는 이유다. 취사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한 순간 'TV는 바보 상자'가 된다. 똑똑하다는 스마트TV. 어쩌면 시청자를 '바보'로 만드는 능력이 똑똑해 져서 스마트TV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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