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레아스(Boreas)는 차가운 북풍, 폭풍 그리고 겨울을 의인화한 그리스 신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북풍으로 간주되었지만 로마 작가 겔리우스(Aulus Gellius. 125년~180년)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23/24년~79년)는 보레아스를 로마 신 아퀼로(Aquilo) 또는 셉텐트리오(Septentrio)에 해당하는 북동풍으로 간주했다. 보레아스는 매우 강력한 신으로 그에 어울리는 난폭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종종 날개 달린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을 기른 채 소라 껍질을 들고 휘날리는 망토를 입은 청년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보레아스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신화는 아테네 공주 오레이티이아를 납치했다는 것이다.
보레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폭력적인 북풍의 신이다. 그는 티탄 신족 아스트라이오스와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이자 제피로스(서풍)와 노토스(남풍)의 형제이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아네모이로 통칭되었다. 그는 난폭한 성격, 오레이티이아 납치, 말과의 관계 등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보레아스는 그리스 북쪽의 트라키아에 살았는데 그곳에서 넓은 바다에 바람을 일으켜 바다를 광란으로 몰아넣고 대지와 숲을 울부짖게 만들었다. 그는 큰 참나무와 가지가 굵은 소나무를 쓰러뜨렸고 보레아스의 강력한 힘은 동물들을 두려움과 추위에 떨게 만들었다. 그들의 두꺼운 털도 북풍을 막을 수는 없었다. 후기 전통에 따르면 보레아스는 님페 피티스의 연인이자 서로 다른 어머니를 둔 두 아들 부테스와 리쿠르고스의 아버지였다.
보레아스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신화는 오레이티이아 납치 사건일 것이다. 오레이티이아는 아테네 왕 에레크테우스와 프락시테아의 딸이었다. 보레아스는 오랫동안 오레이티이아에 대한 감정을 품고 있었고 에레크테우스 왕에게 수차례 그녀의 손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헛된 약속뿐이었다. 마침내 보레아스의 인내심은 한계에 이르렀고 강둑에서 춤을 추고 있는 오레이티이아를 납치하기에 이르렀다. 일부 신화에 따르면 오레이티이아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아테나 신전으로 가는 길에 열리는 테스모포리아(데메테르 여신과 그녀의 딸 페르세포네를 기리기 위해 열린 고대 그리스 축제) 행렬에 참여하던 중 납치되었다고 한다.
보레아스는 바람 구름으로 오레이티이아를 감싸고 트라키아 키코네스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되어 날개 달린 쌍둥이 아들 칼라이스와 제테스(가장 빠른 아르고나우트 중 한 명)와 두 딸 클레오파트라(트라키아 살미데소스의 피네우스 왕의 아내)와 키오네(포세이돈과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를 낳았다. 보레아스와 오레이티이아의 결혼으로 인해 아테네인들은 보레아스를 그들의 혈통으로 여겼다.
오레이티이아의 납치는 플라톤(Plato. 기원전 428/427년~기원전 348/347년)이 <파이드로스>에서 스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가 아티카 시골로 여행할 때 언급되었다. 일리소스 강둑에 도착했을 때 파이드로스는 소크라테스에게 그곳이 보레아스가 오레이티이아를 납치한 장소가 맞는지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신화를 무시하는 동시에 인용함으로써 평소의 철학적 방식으로 대답했다. 그는 보레아스가 신이 아니라 북풍이라고 말했는데 오레이티이아가 님페 파르마케이아와 놀고 있을 때 보레아스는 오레이티이아를 일리소스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말했다.
헤로도토스(Herodotus. 기원전 484년~기원전 425/413년경)에 따르면 아테네인들은 보레아스를 좋아했으며 신탁의 조언으로 인해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위협을 받고 있던 기원전 480년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보레아스는 그들의 요청에 응답해 12년 전에 했던 것처럼 바람을 일으켜 페르시아 함대를 파괴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함대 침몰이 보레아스의 직접적인 결과였는지에 대해 의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그는 아테네인들이 자신들의 도움 요청에 응답해준 보레아스를 기리기 위해 일리소스 강둑에 신전을 지었다고 기술했다.
호메로스(Homer. 기원전 750년경)의 <일리아드>에서는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식 장작더미에 불이 붙지 않을 때 아킬레우스는 보레아스와 그의 형제 제피로스를 소환했다. 아킬레우스는 신들이 그의 기도에 응답하고 장작불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면 신들에게 희생과 놀라운 제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전령의 여신 아이리스는 그의 기도를 듣고 아킬레우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제피로스 궁전으로 달려갔다. 보레아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도 언급되었다. <오디세이아>에 따르면 아테나는 북풍을 조종하여 포세이돈이 광란의 파도를 일으켜 오디세우스를 죽이려고 시도한 후 오디세우스가 육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왔다.
보레아스는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때로는 다르다니아 에리크토니오스 왕의 암말과의 조우으로 인해 '말의 아버지'로 불렸다. 에리크토니우스 왕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보레아스는 이 암말에 욕정을 품었고 스스로 검은 종마로 변신했다. 에리크토니오스의 암말은 옥수수와 곡물로 가득 찬 들판을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파도를 넘을 수 있을 만큼 신속하게 달릴 수 있는 12마리의 망아지를 낳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보레아스와 헬리오스 즉 북풍의 신과 태양신은 서로 경쟁 관계이기도 했다. 그들은 둘 다 여행하는 사람의 옷을 먼저 벗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레아스는 여행자에게 얼음 바람을 날렸고 그로 인해 여행자는 망토를 더 단단히 감싸고 동굴로 피신했다. 헬리오스는 점점 더 강한 햇빛을 발산해 여행자가 동굴에서 나와 옷을 벗고 강에서 목욕하게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 기원전 496년~기원전 406년)는 이 우화를 또 다른 비극 작가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484년~기원전 407년)에게 이야기해 친절과 온유함(헬리오스)이 항상 폭력과 가혹한 대우(보레아스)를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레토는 제우스와 헤라가 결혼한 시기에 제우스의 자식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임신한 티타네스였다. 따라서 헤라는 그녀에게 복수심을 품었다. 헤라의 복수를 피해 레토는 안전한 출산 장소를 찾기 위해 육지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헤라는 또 레토가 태양이 비추는 곳에서 아이들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레토는 파노페우스와 델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레토는 헤라가 보낸 괴물 뱀 피톤을 발견했다. 레토가 출산할 시간이 되었을 때 제우스는 보레아스에게 그녀를 구출해 포세이돈에게 데려가도록 했고 포세이돈은 레토를 델로스 섬으로 데려가 그녀가 안전하게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게 했다.
휘페르보레아(‘북풍 너머’라는 뜻)는 북풍 너머에 있는 땅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북풍 너무 휘페르보레아에는 휘페르보레오이라는 거인족이 산다고 믿었다. 북풍의 신 보레아스가 트라키아에 산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휘페르보레아는 트라키아 너머 북쪽에 있었다. 하지만 고대 저자들은 휘페르보레아의 위치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했다. 일반적으로는 그리스 북쪽 즉 스키타이 땅이라고 한다. 이곳은 태양이 비추지 않으며 필멸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다른 세상으로 신들에게만 접근이 허락되었다. 헤시오도스(Hesiod. 기원전 7~8세기경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 시인)는 휘페르보레아는 보레아스와 연결된 또 다른 방법인 말[馬]과 잘 어울린다고 언급했다. 신화에 따르면 보레아스는 산길에 위치하고 아시아 민속에서 언급된 오늘날 ‘바람의 동굴’로 알려진 동굴에 살았다.
예술에서 보레아스는 수염을 기르고 덥수룩하고 삐죽삐죽한 머리카락을 가진 날개 달린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종종 짧은 주름진 옷을 입고 있다. 그는 때때로 발 대신 뱀 꼬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의 오레이티이아 납치는 고대 그리스 도자기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장면이다.
보레아스 숭배는 아테네와 같은 그리스의 특정 지역에서 사라지고 금기시되기 전에 리비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물리친 후에 보레아스 숭배가 부활했다. 이번에는 아테네에서 가장 강력한 신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아스(Pausanias. 110년~180년)는 보레아스가 스파르타로부터 남부 그리스 마을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이런 그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희생제의를 개최했다고 기술했다. 그리스 북부의 투리오 사람들도 보레아스가 그들을 침략했던 시라쿠사(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있는 고대 도시)의 디오니시오스 1세(Dionysios Ⅰ. 기원전 432년~기원전 367년) 함대를 물리친 후 그에게 희생제의를 바쳤다. 보레아스에게 땅과 집을 제공하는 법령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보레아스 숭배를 받아들이는 그들만의 방식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 해군이 페르시아 군대와 맞서기 위해 아르테미시온 곶으로 항해했을 때 바람에게 기도하라는 아폴론 신전의 신탁이 전해졌다. 이 신탁은 그리스 군대의 나머지 지역에도 전달되었고 결국 승리를 거둔 후 델피 근처에 보레아스 신전을 건설하고 제물을 바쳤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 동안 보레아스 축제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축제에 대한 정보는 많이 부족한 상태로 축제 기간 동안 보레아스를 기리기 위한 연회가 열렸다는 것이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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