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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따따부따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그린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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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당국이 시스타나 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를 보호하기 위해 연간 입장객을 600만 명으로 제한한다고 밝혔다. 프레스코화란 회반죽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해 완성하는 그림으로 로마인들이 오랜 옛날부터 그려온 벽화 화법으로 알려졌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미네르바 성당이나 그리스의 크노소스 궁전 벽화 등이 대표적인 프레스코화로 꼽히고 있다. 특히 프레스코화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크게 유행했는데 시스타나 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가 이 기법으로 그린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시스타나 성당은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행해지는 곳으로 여름 휴가철에는 하루 2만 명이 방문객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티칸 당국은 방문객의 땀과 이산화탄소가 르네상스 시대 그려진 프레스코화에 큰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고 안전한 보존을 위해 입장객의 수를 제한한다고 밝힌 것이다. 바티칸 당국은 에어필터 등 환기시스템과 발열량을 절반으로 줄이는 LED(발광다이오드)조명을 설치하는 등 프레스코화 보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했다. 바티칸 당국은 이런 조치를 통해 시스타나 성당 내부 온도를 20~25, 습도를 50~60%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보수공사에도 300만 유로가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타나 천장화 '천지창조' 

 

시스타나 성당의 세계적 문화유산 천지창조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벽화지만 원래 그는조각가였다. 이탈리아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진 다비드상이 그의 대표작이다. ‘다비드상은 크기가 4m로 원레 피렌체 성당을 위해 1501년부터 4년에 걸쳐 조각한 것이었으나 정부가 베키오 궁전의 정면에 세워놓기로 결정한 것이다. 원작은 아카데미아에 소장되어 있고 피아차델라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진 다비드상은 모조품이다. ‘다비드상의 모델은 다윗으로 골리앗을 기다리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이처럼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했던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오히려 위대한 화가로 역사에 것은 시스타나 성당에 그려진 천지창조벽화 때문일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천재성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조각가였던 그가 벽화를 그리게 된 데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 이탈리아)는 피렌체 근교 몰락한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켈란젤로가 자존심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진 것도 출신 배경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의 작품 속에 부오나로티라는 자신의 성을 새겨넣은 것도 이런 출신적 자존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 빼고는 소득원이 없었던 미켈란젤로에게 몰락한 귀족 집안이라는 출신 배경은 자존심이기도 했지만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 요청한 사람은 교황 율리우스 2세로 평생을 가난으로 시달렸던 미켈란젤로는 이 요구를 수용했지만 약속했던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작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돈 때문에 시스타나 성당 벽화를 그렸지만 자존심은 끝까지 지켰던 미켈란젤로였다.

 

또 미켈란젤로가 활동하던 당시 최고의 건축 설계자였던 도나토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피에타'를 보고 그를 제자로 삼기를 원했지만 미켈란젤로가 거부해 자존심에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시스타나 성당의 천장화도 사실은 브라만테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미켈란젤로를 궁지에 몰기 위해 한번도 천장화를 그려보지 않은 미켈란젤로를 추천했던 것이다.

 

한편 최근 발견된 미켈란젤로의 메모지를 보면 그가 자존심이 강한 반면 가슴이 따뜻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글자를 모르는 하인들을 위해 식단을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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