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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이방인의 눈에 비친 서울, 내 눈에 비친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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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르, 낯선 서울을 그리다/사미르 다마니 지음/윤보경 옮김/서랍의날씨 펴냄

 

'응답하라, 1994'에서 삼천포의 첫 서울 입성을 보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동네에서야 수재 소리 듣던 삼천포였지만 낯선 거대 도시의 그것도 생전 처음 타보는 지하철에서 출구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해 헤매던 촌놈의 어리바리함도 그랬지만, 실은 나의 스무 살 그 때를 삼천포가 그대로 재연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천포가 신촌역에서 어린 양이 되었다면 나를 혼란에 빠뜨린 곳은 신설동역이었다. 수도학원 쪽으로 나오라는 형 말만 믿고 별 것 아니겠지 싶었는데도 이리 나와도 수도학원이고, 저리 나가도 수도학원이었고 게다가 생전 처음 보는 검정고시학원은 왜 그리도 많았던지, 혹시 다른 학원을 수도학원으로 잘못 들었나 싶어 공중전화 부스를 찾았지만 전화는 받지 않고, 촌놈 서울 한복판에서 미아(?)가 될뻔 했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낯선 사람들, 낯선 풍경, 낯선 음식, 낯선 냄새

 

한곳에 오래 머물며 시간을 보내면 여행도 어느덧 일상이 된다. 낯선 사람들, 낯선 풍경, 낯선 음식, 낯선 냄새 등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 일상을 살게 된다. 현명한 여행자라면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때이다. 하물며 여행자가 아닌 생활인이라면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장소에 감흥을 느끼기는 어렵다.


인구 1,000여만 명이 사는 거대한 도시, 서울. 서울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서울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장소이다. TV, 영화, 심지어 소설이나 노래 가사에도 서울이 인용되고 소비된다. 강남은 가수 싸이 덕에 전 세계로 알려졌을 정도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서울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필시 외국인일 것이다. 외국인이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은 어떠할까?

 

▲사미르 다마니의 <사미르, 낯선 서울을 그리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해진 서울을 낯선 시선으로 그린 프랑스 만화가가 있다. 스위스와 국경이 맞닿은 프랑슈콩테 지역에서 태어난 아랍계 프랑스인 사미르 다마니(Samir Dahmani)이다. 리옹에 있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다 앙굴렘에 있는 유럽고등이미지학교(Ecole europeenne superieure de l’image d’Angouleme)로 옮겨 만화를 공부한 전력이 이채롭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에서-

 

형이 역으로 직접 나오고서야 나는 미아가 될뻔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요즘이야 더 하겠지만 당시에도 하숙비는 지방 학생들에게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학 새내기, 낯선 서울에서의 첫 보금자리는 보문동 산동네에서 자취로 시작했다. 변변한 부엌도 없는, 방 하나만 달랑 있는, 화장실도 공동으로 쓰는 그야말로 낯설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했다. 한 지붕 일곱 가족이었으니 조심할 것도 꽤 많았다. 게다가 절반은 외국인이었으니 한국에서 이리 많은 이런 경험을 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더욱 신기했던 것은 새벽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왜 그리도 많았던지 서울은 그렇게 24시간 깨어있는 도시였다. 그렇게 나의 '응답하라, 1992'는 시작되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았던 나도 서울이 온통 낯선 풍경이었거늘 푸른 눈의 이방인에게는 오죽 했으랴!

 

이방인의 눈에 비친 우리는 모르는 서울의 풍경들

 

저자 사미르는 앙굴렘 유럽고등이미지학교에서 만화를 공부하는 동안 한국 유학생들을 만난다. 당시 저자는 우연찮게 한국 음식을 맛보게 되는데, 이후 이 음식의 향기에 사로잡힌다. 바로 떡볶이의 향기였다. ‘떡볶이의 향기는 일종의 유령과 같아서 나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후각을 통해서만 정확히 인지’하였다고 말한다. ‘음식을 맛보았던 경험은 비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향하는 길’, 즉 한국 문화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어느덧 저자는 ‘향기의 유령이 내게 주었던 속삭임을 더듬어 떠올려 가며’ 한국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미르, 낯선 서울을 그리다> 본문 속 삽화 중에서


<사미르, 낯선 서울을 그리다>에 등장하는 유령 같은 존재는 말뚝이탈을 쓰고 있다. 낯선 거리와 사람들을 관찰하는 저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역시 말뚝이탈을 쓰고 있는 인물은 저자의 차기 프로젝트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이방인으로서 서울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저자이기도 하다. 저자는 탈을 쓰고 스스로 낯선 인물이 되어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거리와 풍경 들을 낯설게 바라본다.

 
저자는 서울의 거리, 골목, 풍경과 함께 무엇보다 서울 사람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묘사한다. 그의 그림과 글들을 보다 보면 그동안 몰랐거나 스쳐 지나갔던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이 우리에게도 낯설게 다가오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너무 익숙해서 외면하거나 무시했던 공간이 한 이방인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의미를 다시 부여받는다.

 
당연함이 낯설어지는 순간 우리는 사고의 전환, 의미의 재배치를 이룬다. 전환되고 재배치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묘한 기시감이 머릿속을 살금살금 간지럽힌다. 《사미르, 낯선 서울을 그리다》가 주는 최고의 즐거움은 ‘일상에 엉큼하게 숨어 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자연스런 행동 변화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에서-

 

전라도 촌놈이 10년 남짓 낯선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대전 시민이 된지 또 10년이 넘었다. 10년이 넘어도 여전히 낯설다. 고향이 아니면 어디든 다 그런가 보다. 나 또한 충청도 사람들은 모르는 충청도 풍경을 하나 둘씩 그려가면서 낯설음을 낯익음으로 바꿔가고 있다. 푸른 눈의 이방인에게 비친 서울 사람들은 모르는 서울의 풍경들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 진다. 충청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느리고 느긋하다고 하는데 내 눈에 비친 풍경은, 이 사람들 참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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