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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가만히 있으라'던 세월호,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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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1948년 세계 인권 선언이 구체적으로 실천방안까지 명시한 이 권리는 보편적인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누구라도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중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가운데 느닷없이 정치적이란 말이 무슨 유행가 가사처럼 재생되고 있다. 진원지는 바로 정부·여당과 보수단체, 그리고 보수언론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배웠고 정치적인 것이 뭐가 나쁜가 싶겠지만 이들은 정치적인 것은 종북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또 한번 마녀사냥식 공안정국을 조성하려는 음모가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삼각편대를 이룬 이들의 전방위적인 종북몰이는 먼저 청와대가 시작했다 

 

 

지난 9일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 근처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시각 민경욱청와대 대변인은 순수 유가족분들의 요청을 듣는 일이라면 누군가가 나서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입장이 정리가 됐다며 유가족들의 항의농성을 불순세력이 개입한 정치적 선동으로 폄하했다. 곧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사회불안이나 분열을 야기하는 일들은 국민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바통을 이어받았다. 촛불을 든 세월호 참사 추모인파를 사회불안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언론도 이에 뒤질세라 일부 유가족을 내세워 유가족들의 아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며 가세하고 있다. 특히 재미교포들이 뉴욕타임즈 11일자(현지 시각)진실을 밝혀라(Bring the Truth to Light)’란 제목으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한국 정부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하자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몇 만 불의 돈이 있으면 국내에서 힘들어하는 유가족을 도와줘야 하지 않냐며 이들을 사회불안이나 분열을 야기하는 세력으로 매도했다. 보수단체들도 일제히 국론분열행위국가 망신이니 종북 세력이니 하는 말로 시민들의 자발적 추모집회를 비난하고 있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중에서-

 

국민은 국가 정책을 감시할 권리와 의무가 있고, 제대로 집행되지 않을 경우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말하고 불만을 표시할 수 있는 권리도 있다. 이런 과정 자체가 정치적인 활동이다. 이런 시민들의 정치적인 활동이 없었다면 박정희의 폭압정치도, 전두환의 가짜 정의사회도 기억의 저 편에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현재의 삶은 과거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한 채 억압과 통제의 시대가 유지되고 있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이제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이번 세월호 참사를 인재에 덧붙여 관재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제대로 대처만 했다면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정부를 향해 분노하지 못한다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가족 대표도 언급했듯이 언제까지 애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야 하고 다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재연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라는 명제를 실천해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정부와 보수언론, 보수단체의 정치적이지 말라는 것은 세월호 선원들이 그랬듯이 또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분노하라』, 이것은 책의 제호가 아니다. 93세 노투사의 육성이다. 혁명과 코뮌 그리고 레지스탕스의 역사가 만들어낸 프랑스 지성의 절정이다. 그리고 청년들과 미래를 향한 절절한 애정이다. 앵디녜부! 레지스탕스! 앙가주망! 분노와 저항과 참여를 통하여 거대한 역사의 일부가 되기를 호소한다. 프랑스보다 분노할 것이 훨씬 더 많은 우리들에게 그의 외침은 정수리에 올려놓은 얼음조각처럼 가슴 서늘한 깨달음이 된다. 분노의 표적을 잃은 채 부당한 증오에 함몰해 있는 자신을 깨닫고 진정 분노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격렬한 희망’, ‘평화적 봉기’에 이어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쾌하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추천평 중에서-

 

 

 

이제 분노는, 분노를 표출하는 정치적인 행위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애도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애도는 더 안전하고 밝은 사회로의 약속이 되어야 한다. 분노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살아있는 자들의 책임이자 의무인 것이다. 그리고 분노의 대미는 참여가 되어야 함은 더 이상의 첨언도 필요 없는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수학에서 크기만 다르고 모양이 같은 둘 이상의 도형을 닮은꼴이라고 한다. ‘가만히 있으라던 세월호와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 직업윤리란 털끝만큼도 없었던 세월호와 무능과 무책임을 억압과 통제로 피해가려는 정부. 이렇게 완벽한 닮은꼴이 또 있을까?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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