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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남한 자본주의의 축소판, 강남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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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강남몽>/2010년

1995년 6월29일.
전역을 3개월 앞두고 2년여 군생활을 마감하는 마지막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는 날이었다.  며칠을 몸에서 삭힌 악취는 내무반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정체를 드러냈다. 사회와 격리되고 또 며칠은 더한 오지로 한번 더 격리되어 생활했으니 TV 속 세상이 궁금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비로소 전우의 악취가 내 코를 자극하기 시작할 즘 TV 속 화면에 누구랄 것도 없이 동작그만을 하고 말았다.

분홍색깔 기둥이 텔레비전 양 기둥을 받치고 그 사이로는 무너진듯 한 건물 잔해들 위에서 여태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지만 분명 꿈을 꾼듯 했다. 꿈을 꾼듯 했지만 분명 현실이었다. 백화점이 무너졌단다. 대학 때문에 서울 생활 갓 1년 하고 군대에 온 지방촌놈에게 '삼풍'이라는 백화점 이름은 생소하기 그지 없었으나 그저 강남에 있는 백화점이면 충분했다. 오침 중 꾼 꿈이었으리라! 아니었다. 진짜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었다. 

소설가 황석영이 오랫만에 내놓은 소설 <강남몽>은 삼풍 백화점 붕괴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소설은 삼풍 백화점의 붕괴로 시작해서 강남을 무대로 얽히고 설킨 사람들의 허망한 꿈이 몰락하는 시점에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당시 삼풍 백화점의 붕괴는 각종 비리와 안전불감증의 결과였다. 저자는 대한민국 현대사가 빚어낸 왜곡된 역사의 질곡들을 삼풍 백화점 안에 담아내고 있다.

헛점투성이 남한 자본주의의 축소판, 강남

황석영은 기자간담회에서 소설 <강남몽>을 통해 필생의 작업 중에 하나를 완성했다고 할만큼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작품이다. 게다가 단행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강남몽>에서 다뤄지는 역사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거쳐 1990년대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남한 자본주의의 형성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왜곡되고 굴절된 남한 자본주의는 '강남'이라는 특수한 지역(?)으로 귀결된다. 즉 '강남 형성사'는 남한 자본주의의 형성 과정과 동일시된다. 

남한 자본주의의 상징인 강남과 강남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진이 걸어온 길은 친일과 친미와 독재정권의 부역으로 점철되었다. 그런 김진의 후처가 된 박선녀는 인생역전의 주인공으로 강남에 안착하게 된다. 또 심남수 역시 강남 개발 시기에 부동산 투기로 강남의 어엿한 일원이 된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역사가 바로 개발독재시대를 풍미한 조직폭력배의 활약(?)이다. 그렇게 강남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흡수한 채 거대한 특별구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현대사가 이들만의 꼭두각시놀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발독재의 뒤안길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에만 충실히 살아왔던 소시민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강남을 생활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다. 즉 오늘날 성남시가 만들어지는 광주대단지의 참혹한 현장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임판수 부부가 있고 그의 딸 임정아는 점원으로 일하다 삼풍 백화점의 붕괴로 죽음과의 전쟁에 직면해 있다. 일그러진 한국 현대사, 왜곡된 남한 자본주의는 삼풍 백화점 붕괴를 계기로 추악한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허망한 꿈을 꾸다

저자는 왜 하필 '몽(꿈)'이었을까. 저자의 말대로 '몽자류 소설'과 '몽유류 소설'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몽자류 소설'은 환몽구조로 전개된다. 즉 주인공이 꿈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인물로 살다가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통해 자아의 깨닫음을 얻는 것이다. 김만중의 <구운몽>이나 중국고전 <옥루몽>이 '몽자류 소설'을 대표하는 소설들이다. 일장춘몽이라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반면 <원생몽유록>과 같은 '몽유류 소설'은 주인공이 몽환의 세계를 방황하다 현실로 돌아오는 것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는 특징이 있다. 저자는 꿈과 같이 덧없는 현실을 '강남몽'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서서히 무너지고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한 순간에 붕괴되어버리 삼풍 백화점. 삼풍 백화점의 붕괴는 왜곡된 남한 자본주의, 강남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황석영의 <장길산>을 읽어본 독자라면 <강남몽>의 서사구조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장대한 역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담다보니 그저 역사의 장면장면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할 뿐 좀 더 깊이있는 분석과 통찰은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출간되자마자 일기 시작한 표절논란은 필생의 작업이었다던 저자의 자부심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유라시아 특임대사 임명되면서 일기 시작한 정치참여 논란과 변절 논란은 소설 <강남몽>으로 인해 여전히 황석영이 서있는 좌표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소설 <강남몽>이 나열식 서사구조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점은 역사적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하거나 때로는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가명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마치 꿈처럼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나열식 서사구조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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