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북 리뷰

사회를 바라보는 나만의 가치관을 갖게 해준 책

반응형
윤영규, 최종순 외 18인 교사들의 <참교육의 함성으로>/1989년

오랫만에 맛보는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이어지는 이틀의 휴식. 그러나 어제 그제는 왠종일 시름시름 천정만 바라보느라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아니 최근에 쉬는 게 쉬는 것 같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는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2주일 내내 알수없는 통증과 무력함에 시달렸다. 잔정없이 지내온 아버지와의 이별이 아쉬운 탓이었을까, 좀 더 잘해드리지 못했던 후회였을까. 아무튼 지난 2주일은 맥없는 하루하루였다.

무기력하게 또 다른 한 주를 시작해야 하나 자책이 들 즈음 책장 한켠에 켜켜이 쌓인 먼지 위로 희미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책이 한 권 보였다.
'저 책이 아직도 있었구나!'
10년을 주기로 4번 바뀐 삶의 터전, 그 가운데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수도없이 다녔던 이사. 책을 좋아하지만 그 때마다 없어진 책들이 한두 권이 아니었는데, 어제 우연히 발견한 책은 아마도 여태 내 책장을 장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책이지 싶다.

<참교육의 함성으로>

중학 시절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민주주의를 보았고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9년 그동안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실은 권위주의 권력의 통치 수단으로 쓰이기 위해 왜곡되어 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떤 선생님은 교과서 밖 진실을 가르쳐주기 위해 유인물이라는 것을 만들어 수업 부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 때 그렇게 배웠던 역사들이 요즘 교과서에 당당히 실린 것을 보면 분명 상전벽해의 감개무량이 있다. 1989년 스승의 날 전날 발기인 대회로 태동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는 단순히 교사들의 이익단체로 치부하기에는 당시 우리교육이 안고 있던 문제들은 폭발 직전의 폭약과도 같았다. 아직도 생생하다. '누가 우리더러 스승이라 부르는가?'
 
<참교육의 함성으로>는 전교조가 만들어지기까지, 참교육이라는 말을 일반 대중이 공감하기까지 싸우다 구속되고 해직된 선생님들의 교육 민주화에 대한 열정을 그린 책이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이런 불온서적(?)을 산다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터, 아마도 당시 나와 같은 고민을 했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기억된다. 

물론 당시 이 책을 읽었던 감동은 생생하지만 구체적인 책 내용들은 가물가물하다. 그렇다고 오랫만에 찾아내서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다. 그저 내가 사회를 보는 올바른 시선을 갖게 해 준 책이 여태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 이상의 그것을 느꼈을 뿐이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봐도 절판이 됐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사두고도 별로 쓸일 없었던 복합기로 책 표지에 두껍게 쌓인 먼지를 걷어내고 스캔해서 책제목을 파일명으로 이미지 파일로 저장해 뒀다. 

전체 내용은 다시 읽어보지 못했지만 생각나는 대목이 있어 책을 들춰봤는데 붉은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은 게 절로 웃음이 나온다. 몇 개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광주민중항쟁으로 해직된 전주 완산여상 이상호 교사가 쓴 글 중에 '직업선택의 십계'라는 대목이 있다. 거창고등학교 설립자인 고 전영창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제시한 직업선택의 기준이라는데 이상호 교사에게도 나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직업선택의 십계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이는 곳은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신방학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의식화 교사'라는 이유로 파면당한 최종순 교사가 아이들과 만들어간 신나는 교실 풍경은 요즘 보니 어느 방송에선가 본 선진국의 교실풍경을 연상시킨다. 20여 년만에 그 부분을 들춰보니 최종순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전광주대학교 총장 성내운 교수의 동시에 희미하게 연필로 그은 밑줄이 보인다. 우리 교육의 지향점이 아닐지 모르겠다.

달라질래요

우리반 동무들은 모두 달라요.
얼굴도 다르고
키도 달라요.
모두가 똑같으면 우스울 거야.
우리반 동무들은 모두 달라요.
생각도 다르고
재주도 달라요.
모두가 똑같아지면 우스울 거야.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라서 좋고
오빠는 언니와 달라서 좋아요.
서로가 똑같으면 우스울 거야.
나는 나는 동무들과 달라질래요.
오빠와 언니와도 달라질래요.
모두가 똑같으면 우스울 거야.
나는 나는
이 세상의 누구와도 달라질래요.
달라져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말 거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어린 나이지만 애써 부딪히려 했던 당시의 노력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지 내 나름의 가치관을 만들 수 있도록 등대가 되어주었던 것 같다. <참교육의 함성으로>는 그런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던 시절 나와 함께 했던 소중한 기억이자 추억이다. 캐캐한 냄새가 진동하고 누렇게 변해버려 볼품이 없어진 이 책을 20년 만에 발견한 어제 나는 지난 2주일간 지속됐던 무기력한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새 에너지를 얻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