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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증인, 나는 당신이 그날 한 일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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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희의 <증인>/1956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장기집권 꿈이 무산되는 것처럼 보였다. 1954 1127일 국회는 3선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의결 정족수 부족으로 부결시켰다. 개헌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재적 의원 203명의 2/3 136명을 넘겨야 했지만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표를 던진 의원이 135명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틀 후 역사를 한 편의 코미디로 전락시키고 만 희대의 정치쇼가 벌어졌다. 자유당은 제적의원 203명의 2/3는 정확히 135.333…명으로 0.333…명은 존재할 수 없는 자연인이기 때문에 수학의 45입 법칙에 따라 반이 넘지 않으면 버리는 것으로 해서 의결 정족수는 135명이 맞다는 희한한 논리를 적용해 개헌안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권력에 눈이 먼 이승만과 자유당의 말로는 이미 수천 년 역사가 보여주었던 그대로였다.

 

일각에서는 이런 이승만을 두고 재평가하자고 한다. 시민들이 끌어내렸던 동상도 그 자리에 다시 세우고 있다. 이승만의 공과에 대해서는 수많은 증인들이 있었고 수십 년 동안 논쟁과 필터링을 통해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미 끝났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고 독재자였다는 사실 누구나 다 안다. 더 이상 그를 평가할 뭔가가 남았다는 말인가. 여기 이승만의 역사적 공과를 증언해 줄 또 한 명의 증인이 있다. 바로 해직기자 장준이다.   

 

사건의 증인

 

박연희의 소설 <증인> 45입 개헌과 개헌 세력들의 사상탄압의 현장을 작가만의 시선으로 고발하고 있다. 당시 월남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전형적인 반공이데올로기와 함께 독특하게 그 반공이데올로기로 권력을 유지했던 이승만 정권의 치부를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념적으로 혼란스러운 소설의 구성은 저자가 이념보다 상위에 두고자 했던 휴머니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주인공 장준은 자신의 집 하숙생이었던 간첩 현일우의 증인이 된다. 여기서 장준은왜곡된 사회의 현실을 보게 된다. 그는 증인인데도 불구하고 체포되고 수사관들로부터 폭행을 당한다. 현일우의 방에서 발견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간첩죄의 증거일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21세기 요즘 한국사회에서도 일종의 불온서적(?)으로 매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반공을 국시로 반공이념을 토대로 권력을 유지시켜 가던 당시로서는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일이 된다.

 

표제를 보아도 알 수 있는 일본 카따까나를 금박으로 박은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이었다. 준은 직각적으로 현군이 사상 문제로, 혐의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증인> 중에서-

 

또한 장준은 45입 개헌을 비판하는 기사를 써서 신문사에서 해직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즉 반공을 토대로 유지되고 있는 정권에 반기를 든 것이다. 결국 장준은 사건의 증인이면서 피해자로 전락하고 만다. 당시로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을 것이다. 준은 양심에 한 점 부끄럼없는 증언을 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체포와 구속이었다.

 

역사의 증인

 

준이 양심에 한 점 부끄럼없는 증언을 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체포와 구속이었다는 사실은 시대적 현실의 고발이다. 단순한 사건의 증인이 사건의 핵심 연루자로 둔갑하고 끝내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전락시키는 과정은 기반이 취약했던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통치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폐병에 걸린 준이 살고자 하는 의욕과 집념을 불태우는 마지막 장면은 저자가 주인공 장준을 단순히 특정 사건의 증인으로만 국한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눈으로는, 촛불이 벌렁거려 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준은 귀를 바싹 기울였다. 어딘선가 성당의 종소리가 아득히 밀려오기 때문이었다. 준은 아까운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때처럼, 오래 눈을 감고, 종소리를 엿듣고 있었다. -<증인> 중에서-

 

저자는 장준이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 그날의 탐욕스러웠던 권력의 실상을 증언해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실상을 굳이 거부하려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이승만 정권과 반공이 동일시되지만 저자는 분리해서 비판하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권력과 이념에 가려진 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간, 휴머니즘…

 

다만 생명의 의의를 가져야 하는 조건만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어디까지나 준 개인의 존재가 문제될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증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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