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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평화고무 노동조합과 삼성의 무노조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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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김남천의 『공장신문』/「조선일보」(1931.7.5~15)/창비사 펴냄

언론 보도에 따르면 어느 기업의 업무평가에는 전체 직원의
5%가 무조건 하위 고과를 받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하위 고과는 전부 출산휴가를 쓴 여사원들의 몫이 되었으며 회사는 출산하고 복귀한 여사원들에게 희망퇴직을 강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업무평가에서 나쁜 점수를 계속 매기겠다고 겁을 준다고 한다. 결국 여사원들은 임신해도 회사에 말도 못하고 노동강도를 버티다 못해 유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단다. 60,70년대 대한민국의 얘기가 아니다. 21세기 그것도 일등 기업, 일류 기업, 글로벌 기업이라 자부하는 삼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실을 폭로한 삼성 직원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평생 몸담아왔던 직장에서 해고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대한민국 일등 기업 삼성에는 노동조합이 없다. ‘무노조 신화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지만 그 뒤에 숨은 삼성의 초법적 만행은 막강한 자본의 힘 앞에서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그토록 원하는 꿈의 직장이고 삼성 가족(?)만 되면 마냥 행복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수많은 삼성 노동자들이 원인도 모를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과로에 따른 우울증 등으로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정치도 언론도 심지어 사법부마저도 삼성의 이런 비윤리 경영에 쓴 소리 한마디 못한다. 그들은 이미 삼성 자본의 노예가 된 지 오래다. 3대 세습을 이어오고 있는 삼성의 배금주의적 비윤리 경영의 실체를 폭로할 수 있는 당사자는 바로 삼성 노동자들 뿐이다. 또 거대 자본이라는 삼성과 맞서기 위해서는 조직화된 힘이 필요하다. 삼성의 무노조 신화를 깨뜨리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에도 형식상의 노동조합은 있다. 그러나 거대자본의 방패막이일 뿐 진정한 의미의 노동조합은 아니다. 여전히 무노조 신화를 자랑스럽게 외치는 그들이 아닌가?! 자본과 결탁하고 있는 평화고무의 어용노조처럼 말이다. 김남천의 소설 『공장신문』은 어용노조에 맞서 조직화된 세력을 갖지 못하고 있는 평화고무 노동자들이 진정한 의미의 노동조합을 결성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공장신문』은 1930 <조선일보>에 발표된 김남천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데뷔 이후 줄곧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에서 활동했던 김남천은 소설 『공장신문』을 통해 당시 카프 내부에서 고민되었던 전위로서의 문학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즉 노동자들의 독자적으로는 부르주아적 사고에 젖어있기 때문에 계급의식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해결책은 외부의 개입이다. 외부의 개입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논리다. 오늘날로 치면 ‘3자 개입이니 위장취업이니 하는 말들을 연상시킨다.

 

이런 이유로 타탸 줄 열한 획수는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가장 핵심적인 표현이 된다. 지난 여름 파업이 실패로 돌아가 전열이 혼란스러울 때 홀연히 나타난 어떤 사나이는 주인공 관수에게 일후에 누구를 만나서 인사를 할 때에 그 사람의 성명의 가운뎃자가 타탸 줄이고 열한 글씨, 즉 획수가 열한 개면 그 사람을 믿어주시오. 또 그러노라면 같이 일할 동무들이 생기겠지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 버린다. 파업 실패 이후 평화고무 노동조합은 재창이처럼 회사와 결탁하고 있는 노조간부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회사측과 결탁하고 있는 재창이의 비리를 알고 있는 관수에게 지금의 노동조합은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한다.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할 새 노동조합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던 관수에게 타탸 줄 열한 획수의 정체는 의외의 곳에서 모습을 나타낸다. 지난 파업 이후 신직공 모집에 끼어서 들어온 창선이가 바로 타탸 줄 열한 획수의 정체였던 것이다.

 

내 이름은 사실인즉 박태순일세!”

 

’. 맞다. 타탸 줄 열한 획수! 이미 평화고무 공장에는 새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창수에게 이끌려 간 어떤 집에서는 낯익은 얼굴들이 등불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평화고무 공장신문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점심 직공들이 벤또 안에서 꺼내든 재창이가 평화고무 최전무한테 돈을 받는 장면이 실린 평화고무 공장신문 일호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주장하며 평화고무 직공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드디어 전날 어느 집에 모인 9명이 중심이 되어 새 노동조합을 위한 준비위원회가 결성된다. 평화고무 직공들의 환호 속에 창선이는 좀 높은 데 올라서서 열띤 연설을 한다.

 

여러분, 이제야 우리들은 우리끼리 선거한 지도부를 가졌습니다. 우리들 아홉 사람(원문에서 2자 삭제됨) 준비위원회는 죽을 힘을 다하여 끝까지 여러분들의 의견을 대표하야 싸우겠습니다. 여러분, 자 일동이 ○ 준비위원회 만세-“ -『공장신문』 중에서-

 

1930년대 노동자들의 세력화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소설 『공장신문』이 21세기에도 여전히 가능성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참담하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언론은 경제위기로 삼성이 타격을 입으면 마치 대한민국이 망할 것처럼 보도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자본의 논리 속에 삼성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은 그 동안 눈을 감은 언론과 정치권을 등에 업고 온갖 비열한 탄압으로 좌절되곤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성이 망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망할 리도 없고 또 그렇게 허약하고 빈약한 대한민국이 아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삼성의 무노조 신화는 글로벌 기업 삼성의 자랑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일 뿐이다.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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