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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만삭 아내의 모시조개와 막걸리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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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박태원의 『춘보』/「신문학」3호(1946.8)/창비사 펴냄

『춘보』는 박태원이 쓴 최초의 역사소설이다
. 이 소설을 계기로 [태평성대],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거쳐 북한에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 받고 있는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했다. 『춘보』에서 보듯 박태원 역사소설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대부분의 역사소설들이 권력과 권력을 둘러싼 지배계층의 치열한 암투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박태원은 자기만의 색깔로 역사소설을 창작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춘보』의 주인공 춘보는 막벌이꾼이다. 하루 먹기 급급하다보니 만삭인 아내의 모시조개와 토장을 푼 냉이국 한 번 먹고 싶다는 소원마저도 언제 들어줄지 그의 삶은 막막하다. 약삭빠른 재주를 가진 사람조차 넘기 힘든 생활고를 춘보는 순해빠져서 늘 그 자리만 맴돌고 있다. 이런 춘보도 세상에 대고 소리칠 때가 있다. 술기운만 빌리면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춘보다. 만삭인 아내는 춘보의 이런 성격이 늘 걱정스럽다. 반면 아내는 여장부다. 만삭인 몸으로도 동네 허드렛일은 다 도맡아 한다. 춘보는 이런 아내에게 늘 미안할 뿐이다.

 

저자 박태원이 이 부부의 일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역사적 배경이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극에 달했을 때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 질문은 그다지 변변치 못하게 된다. 저자는 거대한 지배세력에 맞서 소리없이 저항하는 힘없는 민중들의 일상을 통해 당시 지배계층을 비판하고자 했음은 자명해 진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백성들에게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하여 공사비 재원을 마련하는 등 백성들의 삶을 그야말로 도탄에 빠지게 했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모두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소설 『춘보』의 주인공 춘보는 이런 암울한 시대의 한가운데서 경복궁 담벼락에 아래 자리잡은 집마저 강제철거를 당할 위기에 놓여있다는 설정으로 지배권력에 대한 기층민중의 저항의지를 그려내고 있다.

 

소극적 저항이 주는 강렬한 메시지

 

소설 『춘보』에서 보여주는 민중들의 지배권력에 대한 저항의지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춘보는 지배권력의 횡포 앞에 직접적인 저항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현재의 삶을 자포자기하거나 직접적인 저항의 고작 꿈에 그치고 만다. 한편 이런 소극적 저항은 지배권력의 탄압이 더욱 악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권력의 횡포에 맞선 줄기찬 저항이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면서 사람들은 체념에 이르게 된다. 춘보도 마찬가지다. 어느덧 단념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춘보는 밥 달라는 자식들의 가엾은 모습을 보며 타고난 팔자 탓으로 돌리고 만다.

 

모두 제가 타고난 팔자다. 누가 쌍놈으로 태어나랬더냐? 원망을 하려거든 쌍놈의 집안 어렵고 천한 집안으로 점지를 하여준 삼신할머니에게나 대고 하여라….헐리겠지. 헐려도 하는 수 없다. 누가 하필 고르다 골라 대궐 담 밑에서 살랬더냐? -『춘보』 중에서-

 

그렇다고 춘보의 저항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다. 표출하지 못한 저항의지는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게 된다. 비록 꿈이라 할지라도 잠재된 저항의지는 결국 표출되고 그 순간 사회변혁의 단초가 마련되는 것 아니겠는가!

 

뭐라구? 이눔아그래 내가 글른 소리 했니? 난 바른 소리 밖에 안했다! 운현대감이 아무리 상감님 아버지래두 잘못허는 거야 잘못헌다지 그럼 뭐래야 네 직성이 풀리겠니? 그걸 이눔아! 니가 중뿔나게 나설 게 뭬 있느냐 그 말이다!” -『춘보』 중에서-

 

앞서 『성탄제』에서도 보았듯이 박태원식 휴머니즘과 저항은 소극적이다. 그러나 이 소극적인 표현이 독자로 하여금 더욱 더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게 또한 박태원 소설의 매력이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 역사 소설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다지지 않았나 싶다.

 

막걸리 국가보안법의 원조(?)

 

자신의 처지를 팔자탓으로만 돌리던 춘보가 꿈에서나마 저항의지를 내보이는 데까지 발전한 것은 좌포청에 붙들려 간 맹서방 소식을 들은 후부터였다. 조선 백성치고 모르는 이 없는 대원군의 비계를 비웃었다는 죄였다. 맹서방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소리를 술김에 한마디 하고는 좌포청에 끌려간 것이다. 지배권력의 횡포와 비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은 60,70년대 유행했던 막걸리 국가보안법을 떠올리게 한다.

 

말 그대로 대포집에서 막막한 현실을 하소연할 곳 없는 민중들이 막걸리 한잔 걸죽하게마시고 내뱉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공산주의가 낫다는 푸념이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었다니 사실이건 소문이건 간에 암울했던 시대에 대한 풍자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지배권력의 얼토당토 않은 탄압이 21세기에는 사라졌을까? 안타깝게도 권력의 횡포는 더 교묘한 방법으로 더 악랄하게 바뀌었을 뿐이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며 국민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러나 촛불집회가 마무리 된 후 언론의 철저한 외면 속에 얼마나 많은 집회 참가자들이 고통을 당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권력의 속성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변하게 하는 힘이 있다면 오직...

 

나무는 겨울이 혹독할수록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그러기에 어김없이 봄은 찾아오고 나무는 더 화려하고 더 선명한 빛으로 꽃을 피울 수 있게 된다.

 

미장이 신서방의 부탁으로 지게벌이보다 나은 일을 하게 된 춘보가 첫 출근을 하는 날 술 먹지 말고 일찍 들어오라는 아내의 말에서 당시 억압된 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 하다. 춘보는 딸 순이에게 산에 가서 냉이 좀 많이 해오라며 자신도 오늘은 기어코 모시조개를 사가지고 들어올 결심을 한다.

 

우리 시대 춘보는 만삭 아내에게 모시조개를 넣고 토장을 맛나게 푼 냉이국을 끓여줄 수 있을까?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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