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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로마

고대 로마의 군사적 팽창과 전쟁의 여신 벨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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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중반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채택되기 전까지 로마는 본질적으로 다신교 사회였다. 즉 로마인들은 많은 신들을 숭배했으며 일년 내내 신들을 기리는 축제를 열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로마인들의 삶에서 신들의 지위는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예를 들어 유피테르와 같은 중요한 신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사원 내부 또는 그 주변에서 열리는 공식 축제인 페리아에(Feriae)로 기리는 영예를 얻었다. 이런 축제들은 로마 달력에 날짜가 특정되었으며 공동체가 인정하고 원로원이 공적 자금을 투입해 조직▪감독한 공식적인 축하 행사였다. 이런 공적인 축하 행사를 사크라 푸블리카(Sacra Publica)라고 불렀는데 공식 달력에 오로지 못한 하급 신들에게는 수여되지 않았다. 이 하급 신들은 가정이나 공공 장소에서 개인 의식을 통해 숭배되었다.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하는 부유한 시민들은 개인적으로 대규모 공개 행사를 개최했을 것이다.

 

이런 행사가 있었다는 것만 봐도 로마 신들의 목록이나 숭배는 폐쇄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신교 로마인들은 공식 달력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점령 지역에서 숭배된 신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전쟁의 여신 벨로나. 출처>구글 검색

 

로마인들에게 군사적 성공이 중요했다는 것을 고려할 대 벨로나(Bellona)와 같은 전쟁 여신은 잘 기록된 주요 신이었을 것이다. 벨로나는 매년 6월 3일에 열리는 페리아에를 통해 기념되었지만 그녀의 기원은 공화정 이전 로마에서의 숭배에 대한 문서화된 증거가 없어 모호하다. 많은 고대 작가와 역사가들은 벨로나에 대해 간략하나마 언급했다. 리비(Titus Livius. BC 59~AD 17. 고대 로마의 역사가)는 벨로나 사원에 그녀를 언급한 여러 건의 원로원 회의 기록을 남겼다. 1세기 경에 활동한 로마 시인들 즉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 43~AD 17),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AD 19), 티불루스(Albius Tibullus. BC 55~BC 19), 스타티우스(Publius Papinius Statius. 45~96) 등도 그녀의 공적을 언급했다.

 

벨로나는 일반적으로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방패를 들고 창, 칼, 피 묻은 채찍, 피 묻은 횃불 등을 휘두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원본 작품이 남아있지 않고 현재 우리가 보는 것들은 대부분 후기 로마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어쨌든 이러한 묘사는 광적인 피의 욕망, 사회 전복, 혼돈 및 무의미한 학살에 대한 그녀의 성향을 자세히 설명한 1세기의 시적 표현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벨로나는 전쟁의 신 마르스와 다양하게 관련이 있었다. 마르스는 벨로나의 배우자, 형제, 피 묻은 손으로 고삐를 잡고 있는 마부 등으로 언급되었다. 그녀는 또한 마르스와 숭배 파트너인 고대 로마의 전쟁 여신 네리오와 동일시된다. 벨로나는 하늘과 천둥의 신이자 고대 로마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의 자식일 수도 있다. 그리스의 에니오 여신, 카파도키아(오늘날의 중부 터키)의 마 여신 등과도 동일시된다.

 

벨로나는 벨룸(Bellum. ‘전쟁’을 의미하는 라틴어)과 관련된 고대 로마의 여신이었다. 벨로나 숭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카포도키아의 마 여신과의 관계를 통해 더 피비린내 나고 더 난잡하고 더 열광적으로 변해 갔다. 벨로나의 사제나 숭배자들 그룹에는 하스티페리와 벨로나리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벨로나리는 춘분 즈음에 열리는 피의 날 축제인 디에스 산구이니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광신적인 숭배자들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끔찍한 관행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키벨레 여신의 사제들은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했고 아티스 신의 사제들은 스스로 거세했으며 벨로나리는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팔다리를 잘랐다. 그 피는 축제 참가자들에게 뿌려졌고 전쟁의 분노를 풀어달라는 기원과 함께 벨로나 여신에게 바쳐졌다. 벨로나리는 음주를 통해 그들의 광기를 더욱 증가시켰다. 벨로나를 숭배했던 사제들의 교육 모임인 하스티페리는 이 축제에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벨로나의 창을 들고 행렬에 참가했다.

 

전쟁의 신 마르스와 벨로나. 출처>구글 검색

 

벨로나는 원래 일부가 기원전 753년에 설립된 로마로 이주한 이탈리아 중부 사빈 부족의 여신이었다. 고대 로마의 학자인 바로(Marcus Terentius Varro. BC 116~BC 27)는 초기 라틴어에서 여신의 이름은 두엘로나(Duellona)였고 전쟁은 두엘로(Duello)였다고 기록하면서 벨로나 여신의 뿌리를 강조했다. 벨로나의 사비족 뿌리설은 사비족 사람들이 벨로나에게 봉헌한 신전의 건축에 관한 기록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제3차 삼니움 전쟁(BC 298~BC 290. 이탈리아에 패권을 확대해가던 로마와 삼니움족 사이에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 중 하나) 동안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Appius Claudius Caecus. BC 340~BC 273)는 남부 에트루리아(지금의 이탈리아 중부)에서 에트루리아인, 갈리아인, 삼니움인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맞섰다.

 

리비는 카이쿠스가 주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벨로나, 오늘 우리에게 승리를 허락하신다면 나도 당신에게 신전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기도했다고 썼다. 리비는 전투 내내 카이쿠스가 전체 군대와 동등한 용기를 보여 주었으며 반복적으로 ‘승리자 벨로나’를 호출했다고 언급했다. 결국 로마는 큰 승리를 했고 로마로 돌아온 카이쿠스는 약속대로 고대 로마의 거대한 원형 경기장인 키르쿠스 플라미누스 근처 캄푸스 마르티우스(마르스 신에게 봉헌됨) 남쪽에 벨로나 신전을 건설했다.

 

신전은 로마 성벽 바깥쪽에 있었으며 특히 전쟁이 의제일 때 신전을 회의 장소로 자주 사용했던 원로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벨로나 신전과 그 주변은 로마가 외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절차의 중심이 되었다. 신전 앞에는 작은 기둥인 콜루멜라가 피로스(Pyrrhus. BC 319~BC 272. 그리스 북부에 있는 에피로스의 왕으로 로마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역사상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의 병사가 강제로 구입한 땅 안에 놓여 있었다. 이로 인해 그 땅은 외국 영토가 되었다. 고대 로마의 사제인 페티알 중 한 명이 적의 영토에 창을 던졌을 때 공식적으로 전쟁이 선포되었다. 페티알(또는 페티알리스)는 로마가 정의로운 전쟁에만 참여하도록 보장하는 기능을 포함하는 외교에 관여하는 성직자 집단이었다.

 

로마의 모스 마이오룸(mos maiorum. 고대 로마인들의 사회적 규범을 규정한 불문율)은 침략에 대한 권리와 더 많은 영토에 대한 욕구를 전쟁의 정당한 원인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외국이 로마에 해를 끼쳤다고 판단되면 페티알은 보상을 요구했다. 만일 이러한 보상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페티알은 의식용 창을 적의 영토에 직접 던졌다. 이러한 관행은 기원전 280년 피로스에 대한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처음 기록되었으며 오비디우스와 리비가 이를 언급했다. 초기에는 페티알이 창을 던지기 위해 외세의 국경으로 이동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로마가 확장됨에 따라 이것이 비실용적이게 되었고 벨로나 신전에서 약식으로 수정된 의식이 이루어졌다.

 

야누스와 벨로나. 출처>구글 검

 

로마 성벽 바깥에 위치한 벨로나 신전은 로마 원로원이 로마 시내로 들어가기를 꺼려한 승리한 장군들을 환영하는데 사용되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것은 그들의 통치권에 대한 항복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이 신전은 또한 원로원이 로마 입국이 금지된 외국 대사들을 만날 때 사용되었으며 로마 내 벨로나 신전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벨로나에게 헌전된 두 번째 신전은 아우구스탄 레지오 3구역에 있었으며 아브 이시스 세라피스(레지오 3구역의 메인 거리) 아브 아뎀 벨로네 루필리아이로 묘사된 성직자의 묘비를 통해 알려졌다. 후자는 신전 건축자의 이름으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290년에 집정관으로서 삼니움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제는 벨로나리에게 적용되는 용어인 파나티쿠스(Fanaticus. ‘광신자’라는 뜻)로 묘사된다.

 

로마 안에 벨로나에게 헌정된 두 개의 다른 신전이 있다는 것은 비문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벨로나 인술렌시스 신전은 아마도 테레베강의 섬에 있었을 것이다. 신전에서 제수용 그릇을 팔았던 아피디아 마가 세운 묘비를 통해 추정한 것이다. 아마도 이 신전은 벨로나와 동일시된 마 여신에게 헌정된 것으로 보인다. 벨로나 여신에게 봉헌된 네 번째 신전은 포르타 콜리나 근처의 레지오 5구역에 위치했으며 숲 안의 계단식 제방에 서 있었다. 비문을 통해서만 알려진 이 건물은 포르타 콜리나 전투(기원전 82년 11월 1일에 벌어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마리안, 삼니움, 루카니아 사이의 내전) 이후 기원전 82년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BC 138~BC 78. 로마 시대의 정치가)가 건설했을 것이다. 이 신전은 카포도키아의 마-벨로나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풀비넨시스는 벨로나 여신의 동상이 전시된 의식용 침상 또는 제방 위의 신전 위치를 가리킬 수 있다. 1872년 포르타 콜리나(기원전 578~535년에 로마의 전설적인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로마의 랜드마크)에 인접한 재무성 건설 작업 중에 벨로나의 두 기념물이 발견되었다. 하나는 긴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등장하는 조각상의 발등에 새겨진 비문이고 다른 하나는 비쿠스 벨로나에를 언급하는 비문이었다.

 

카피톨리움 언덕(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에 있는 벨로나 신전은 기원전 48년에 이시스와 세라피스 신전이 철거될 때 의도치 않게 파괴되었다. 신전이 파괴된 후 인간의 피부가 담긴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이곳과 언덕 꼭대기는 마-벨로나의 난잡한 숭배와 양립할 수 있으며 앞서 언급한 신전과 마찬가지로 이 신전도 술라가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벨로나 숭배가 로마에 도입되면서 벨로나와 키벨레(로마에서는 마그나 마테르로 알려짐), 아티스 및 이시스와 같은 다른 동양의 신들과의 연관성이 증가했으며 숭배는 점점 더 피비린내 나고 이국적으로 변해갔다.

 

벨로나가 새겨진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의용군 뱃지.   출처>구글 검색

 

군사적 능력, 전 멘토인 마리우스(Gaius Marius. BC 157~BC 86.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 장군과의 불화 그리고 기원전 81년 독재자의 지위를 부활시킨 것으로 유명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아마도 벨로나의 가장 유명한 신봉자일 것이다. 쿠르수스 호노룸(고대 로마 공화정과 초기 로마 제정 시대의 공직의 순서)이 상승하는 동안 술라는 카포도키아에서 총독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마 여신을 만났을 것이다. 그의 승리 중 일부는 벨로나 신전 방문이 선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88년에 술라는 적들과 맞서기 위해 놀라(지금의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도시)에서 행군했다.

 

벨로나 여신이 그의 꿈에 나타나 적의 이름을 지정하고 그들을 개별적으로 제거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꿈에서 술라는 벨로나의 벼락을 사용해 이 일을 성취했다. 또 다른 경우로는 적 장군의 노예가 신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술라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했다. 포르타 콜리나 전투 이후 술라는 벨로나 신전에서 원로원 회의를 주재해 6천명의 죄수들을 빌라 푸블리카(검열 기관)에서 모인 사람들이 다 보는 가운데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악명 높은 살인자로서 술라와 마-벨로나는 잘 어울렸다.

 

벨로나를 묘사한 로마 미술품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벨로나 숭배와 관련된 7개의 비문이 로마에서 발견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포룸에서 발견된 초기 비문 중 하나는 피루스와의 전투를 언급하고 있으며 다섯 개의 비문은 벨로나의 거주지 또는 신전 아뎀 벨로나이를 언급하고 있다. 벨로나를 기리는 신전과 비문은 로마의 항구 도시인 오스티아를 포함해 로마 외곽에서도 확인되었다. 이곳에는 하드리아누스(Hadrian. 76~138) 황제 통치 기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은 뒷골목의 붉은 벽돌 신전과 서기 140년에 제작된 비문이 있다. 아프리카 북서부의 누미디아 비문에는 두 명의 벨로나리와 신전 내부 장식들을 기록하고 있다. 브리타니아의 군단 요새인 에보라쿰 바깥에 있는 브리타니아 벨로나 신전은 3세기 초 브리튼 탈환 기간 동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 황제가 건설했다.

 

이 밖에도 알레시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게르마니아 등에서도 비문이 발견되었다. 많은 비문은 또한 용기, 남성다움, 우수성, 용기 및 힘을 포괄하는 고대 로마 특유의 미덕인 마르스와 비르투스를 기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문은 종종 군인이나 군인 가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벨로나에 대한 헌신은 군대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벨로나 추종자들은 도시 공무원들, 개인들, 가족들과 사회적 그룹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는 꿈을 꾸는 동안 받은 ‘비수 이우수스’ 또는 ‘엑스 이우수’라는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집에 더 가까운 곳에는 프라이펙투스 알라이 즉 기병대 사령관인 루피누스 아우구스타이와 그의 아들이 세운 올드 칼리슬레 비문이 벨로나 제단에 바쳐졌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4세기까지 로마 전역에 벨로나 숭배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벨로나의 중요성은 점점 쇠퇴해 갔다. 마-벨로나와 피에 굶주린 술라 사이의 연관성은 보다 전통적인 로마인들의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아우구스투스(Gaius Julius Caesar Augustus. BC 63~AD 14.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통치기간 동안 벨로나가 중요했던 원로원의 권위와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42년 그의 양아버지인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BC 44.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의 복수를 위해 착수한 빌립보 원정 중에 복수자 마르스를 의미하는 마르스 울토르 신전에 맹세했다. 다양한 이유로 아우구스투스 포룸 안에 새로 건설된 이 신전은 기원전 2세기가 되어서야 봉헌되었다. 그 후 특히 전쟁 및 승리와 관련된 다양한 기능이 마르스 울토르 신전으로 이전되어 벨로나를 포함한 다른 전쟁 신들의 역할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한 때 인상적인 구조물이었지만 오늘날 뼈대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자료: vindol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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