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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그리스

가장 위대한 기간테스, 알키오네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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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서 알키오네우스Alcyoneus는 영웅 헤라클레스의 적수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보통 거세한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피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기간테스 중 하나였다. 기원전 2세기 경 활동했던 고대 그리스의 문법학자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알키오네우스와 헤라클레스의 대결은 올림포스 신들과 거인들간의 우주 전쟁인 기간토마키아의 일부였다. 또 알키오네우스와 포르피리온은 가장 위대한 기간테스였으며 자신의 땅에 있는 한 알키오네우스는 불멸의 존재였다. 헤라클레스가 화살로 알키오네우스를 쓰러뜨렸지만 그는 다시 살아났다. 헤라클레스는 아테나의 조언에 따라 알키오네우스를 그의 땅에서 끌어냈다. 그의 땅을 벗어난 순간 알키오네우스는 곧바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 경 그리스의 서정시인 핀다로스는 헤라클레스와 알키오네우스의 대결과 기간토마키아는 별개의 사건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알키오네우스가 헬리오스의 소를 훔쳐 기간토마키아가 발발했다고 한다.

 

 

꽃병 그림들은 헤라클레스가 잠든 알키오네우스와 마주치는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알키오니데스Alkyonides는 그의 일곱 딸들을 일컫는 말이다. 아마도 알키오네우스는 원래 거인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의 수많은 괴물 적수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헤라클레스와 알키오네우스의 대결은 기원전 6세기 경의 여러 꽃병에 묘사되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헤라클레스와 알키오네우스의 전투 묘사는 헤라 여신에게 바쳐진 첫 신전의 메토프(Metope. 도리아 건축 양식의 프리즈에서 두 개의 트리글리프 사이에 위치한 사각형의 패널)로 헤라클레스가 알키오네우스의 머리채를 잡고 칼로 찌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장면은 올림피아의 몇몇 방패 띠 부조에도 묘사되어 있다. 테라코타 프리즈(Frieze. 방이나 건물의 윗부분에 그림이나 조각으로 띠 모양의 장식을 한 것)와 기원전 6세기의 항아리에는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알키오네우스를 보여준다. 이 묘사에서 날개 달린 잠의 신 힙노스가 자고 있는 알키오네우스 근처에 있다. 이 묘사는 헤라클레스가 잠자는 적을 이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학에서 알키오네우스를 최초로 언급한 이는 기원전 5세기 경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 핀다로스였다. 핀다로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와 텔라몬은 펠그라(그리스 신화의 신화적 장소로 현대의 마케도니아 반도로 추정됨)를 여행하던 중 알키오네우스와 마주쳤다. 핀다로스는 알키오네우스를 ‘산처럼 거대하고 끔찍한 전사’로 묘사했다. 이 전투에서 알키오네우스는 열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로 맞선 두 영웅에게 패배해 죽었다. 이 전투에 대한 묘사에서 다른 신이나 거인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전투가 기간토마키아와는 별개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 핀다로스는 알키오네우스를 ‘거대한 산’이라고 묘사하고 바위를 무기로 사용했다고 서술했지만 그를 기간테스로 부르지는 않았다.

 

핀다로스에 따르면 알키오네우스는 트라키아(발칸 반도 남동쪽을 부르는 지명)의 지협에 살았다. 그는 헬리오스의 소를 훔쳤고 이 사건은 티탄족과 올림포스 신들 간의 전쟁인 기간토마키아의 발단이 되었다. 기간테스 중 하나였던 알키오네우스는 헤라클레스를 공격했지만 그 장소는 트라키아 지협이 아닌 코린토스 지협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이 때 게리온(세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의 소떼를 끌고 오는 중이었다. 기원전 6세기 항아리에 묘사된 소는 헬리오스가 훔친 소이거나 게리온에게서 빼앗은 헤라클레스의 소일 것이다.

 

알키오네우스는 페르가몬 신전의 기간토마키아 프리즈에서 아테나와 싸우고 있는 날개 달린 거인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한 무명 작가는 알키오네우스를 ‘팔리니의 페그라 출신 알키오네우스이자 가장 나이가 많은 기간테스’로 언급한다. 로마의 궁정시인 클라우디안(Claudian. 370년~404년)은 알키오네우스가 베수비오 화산(이탈리아 나폴리 인근의 화산) 아래 묻혔다고 주장했다. 반면 로마 시대 그리스 출신 소피스트 필로스트라토스(Philostatus. 170년~247년)에 따르면 베수비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대리석을 알키오네우스의 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많은 기간테스들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고대 지중해 세계를 다룬 비잔틴 백과사전인 <수다>에 따르면 알키오네우스는 일곱 명의 딸이 있었는데 알키오네우스가 죽자 일곱 딸들은 모두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렇게 죽은 알키오네우스의 일곱 딸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5세기 무렵의 그리스 시인 논노스는 그의 시 ‘디오니시아카’에서 알키오네우스를 디오니소스가 기간토마키아에서 싸운 몇몇 거인들 중 한 명으로 언급했다. 논노스에 따르면 가이아는 디오니소스에 맞서 싸울 상대로 기간테스를 세우고 기간테스가 디오니소스를 제압하면 알키오네우스에게 아르테미스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논노스는 알키오네우스가 4미터의 키에 산을 무기 삼아 싸웠다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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