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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소문이 권력인 시대의 현명한 대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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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성석제/1995년

 

호랑이가 소머리를 쓰고 곶감을 사칭하며 여우떼를 물리친다는 마해송의 동화 <호랑이와 곶감>은 호랑이가 곶감을 무서워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엄마는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호랑이가 잡아간다고 무서운 표정으로 말하지만 아이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세상에 무섭다는 것은 다 동원해 보지만 아이의 울음은 그칠 줄 모른다.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한 것은 엉뚱하게도 울지 않으면 곶감을 주겠다는 엄마의 단 한마디였다. 이 말을 밖에서 듣고 있던 호랑이는 곶감의 정체를 알지도 못한 채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한 엄마의 말에 곶감을 무서워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엄마의 재치라고 할 수 있는 이 설화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실체도 없는 말[言]의 위력이 핵심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발도 없이 천 리를 간다는 말, 어느 누구도 그 실체를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은 호랑이도 떨게 하는 법이다. 

 

성석제의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제목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제목에서 비장함이 느껴진다고? 맞다. 벼랑 끝에 선 한 남자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으니 당연히 비장해야 한다. 비장하지만 저자의 거침없는 필력은 비장함을 무기로 독자들을 풍자의 세계로 이끌고 만다. 친절하게 각주까지 달아둔 소설을 그리 흔하게 읽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저자의 화려한 필력이 이끄는 풍자의 세계는 바로 호랑이도 떨게 한다는 말[言], 소문이다.

 

세상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말[言]이 지배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물리적인 힘의 세계 즉 조폭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인 힘의 세계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힘에 의해 추동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또 다른 힘이 다름아닌 말, 소문이다. 즉 주인공 '그'는 세계를 끌고 나가는 힘이 팩트[사실, Fact]가 아님을 간파하고 있는 나름대로 지능적인 조폭이다. 주인공 '그'가 신화가 되고 다시 신화가 깨지는 데는 물리적인 힘의 현장이 아니라 가공의 세계인 소문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4.5초란 무엇일까. 위험표지도 무시한 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질주한 주인공이 탄 차가 다리 난간에서 추락하는 시간을 물리적으로 계산한 것이다. 즉 죽기까지 남은 시간이자 신화가 깨지는 찰나의 순간이기도 하다. 저자는 친절하게 각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가령 이런 식으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남긴 갈릴레이 갈릴레오 덕분에 자동차가 공중에서 떨어질 때의 시간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공기의 저항을 무시했을 때 지상으로 낙하하는 물체의 운동을 자유낙하라고 하는데 자유낙하 운동은 물체의 낙하 거리가 지구의 반지름에 비해 작을 경우, 중력가속도 g(9.8미처/초)에 따르는 등속도 운동이 된다. 물체가 지상 h미터의 높이에서 조용히 떨어진다고 하고 t초 후의 낙하 거리를 s미터, 그 순간의 속도를 v미터/초라고 하면, 낙하 거리는 가속도 곱하기 시간의 제곱의 2분의 1이다. 이는 , v=gt라는 산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 지상 100미터 높이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아래로 떨어지는 대머리독수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독수리가 땅에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 고로 t=4.5175394이다. 또 최종적으로 땅에 닿은 순간의 속도 v=9.8x4.5175394. 이를 시속으로 환산하면 159.37878킬로미터가 된다. 불쌍한 대머리독수리. 머리가 무사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중에서-

 

세계의 지배원리를 제대로 간파하고 있는 '그'는 스스로를 신화와 전설로 만들면서 조폭세계의 중간보스에까지 오른다. '그'가 구축한 신화가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기존 신화를 무너뜨려야만 한다. 결국 '그'는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마사오를 불러내서 비겁한 방식으로 그의 팔 하나를 도끼로 자른다.

 

마사오는 떠났다. 그는 다른 곳에 가서 자리를 잡을 것이다. 늙은 외팔이로서, 왜 그렇게 당해야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상처를 지닌 늙은이로서 여생을 마치게 되었다. 이제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인물이 왔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거의 다 왔다. 반의반, 반의반이 점점 빠르게 다가든다. 그의 머릿 속의 일념들도 빠르게 소진된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중에서-

 

이제 '그'의 신화는 철옹성을 구축하게 되었을까. '그'가 이용했던 말의 위력은 되레 자신의 구축한 신화를 깨뜨리는 원인이 된다. 마사오를 제거했지만 '그'에게는 비겁하다는 추문이 돌았고 그 추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외팔이가 된 마사오를 마주치고는 전속력으로 도주하려다 지금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순간에 이른 것이다. 4.5초 후 '그'의 신화는 물론 '그'의 이승에서의 삶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영화 <친구>를 보는 듯 하고 <넘버3>를 책으로 읽은 듯 한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비극적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비극의 잔상만을 남기지는 않는다. 비극이 희극으로 승화된 데는 저자의 사회를 보는 냉철한 시선과 말에 의해, 소문에 의해 왜곡된 현실을 유쾌한 필치로 에둘러 보여주는 풍자 때문일 것이다. 한편 소설 속 인물은 '청카바'나 '청바지' 등 실제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지칭된다. 이는 인간존재에 대한 허무주의적 접근이기도 하고 익명성으로 지배하는 말, 소문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이성이나 과학, 합리성 등으로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지만 허무맹랑한 말이 창조해낸 소문의 위력은 인간이란 존재의 위대한 가치들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단 4.5초 안에 파란만장했던 영웅(?)의 일대기가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말[言]로 소통해야 할 시대이지만 말[言]을 경계해야 할 시대이기도 한 것이다. 

 


바야흐로 '말의 향연'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계절이 왔다. 대통령 선거가 불과 두 달 남짓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말 때문에 추락하기도 하고 말 때문에 기사회생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 때문에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말 때문에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후회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말의 속성은 한 번 뱉어버리고 나면 그게 진실이건 진실이 아니건 상대방에게는 치명타를 입고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에서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것은 각 대선캠프에게는 필요악인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에서 말이 만든 소문은 언론을 통해 전파된다. 언론은 취사선택을 잘 한다. 취사선택을 잘 한다는 것은 권력을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이고 스스로 권력이기를 열망한다는 것이다. 언론자유니 언론이 세상을 보는 창이니 하는 말들은 대학 강의실에만 있을 뿐 현실에서 언론은 권력과 자본의 노예는 될지언정 결코 언론 소비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스스로 권력이 되기위해 언론은 과감히 통제의 억압을 갈구한다. 그래서 정치와 언론은 기앤테이크를 즐긴다. 현대사회에서 말의 위력, 소문은 곧 언론이다. 그래서 소문이 권력인 계절, 유권자의 권리를 지키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언론에게 더욱 더 강력한 통제의 사슬을 옭아매야한다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의 통제 대신 시민과 유권자의 힘으로 언론을 통제해야 한다. 

 

또 하나 이 계절을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소설 속 주인공 '그'가 소문의 위력을 믿고 승승장구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은 것처럼 말은 듣되 맹신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가 간과한 말 속에 숨은 사실과 진실을 파헤치는 각고의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시 말이 권력인 시대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진실은 구름 뒤에 있다고 한다. 언젠가 구름이 걷히면 진실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길 기다리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도 비루하지 않은가! 구름은 자연현상이기도 하지만 세치 혀로 쏟아내는 입김이 대기 중에 상승해 만든 허상이기도 하다. 어렴풋한 구름 뒤에 진실은 보고자 하는 사람의 몫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무슨 말이든 해보려고 했다. 그 말은 발음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없다. 정녕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청바지의 입을 빌린 나는 기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엄마, 무서워."

그리고 그는 물에 빠져 죽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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