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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아내를 보는 두개의 시선, 은희경vs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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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처/은희경/1996년

 

6월17일

나는 독신이다. 직장에 다니는데 아침 여섯 시부터 밤 열 시 정도까지 근무한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다. 이 시간에 난 읽고 쓰고 음악 듣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외출은 안되지만. -<빈처> 중에서-

 

은희경의 소설 <빈처>는 주인공이자 남편인 '나'가 화장대 위에 놓인 가계부인 줄 알았던 아내의 일기장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내의 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그녀가 ○○○ 줄은 몰랐다'를 반복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나'와 아내는 사랑해서 부부가 되었지만 둘 사이에는 크나큰 장벽같은 것이 있었음을 또 아내는 극심한 소외감 속에 살아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즉 허다하게 반복되는 부부의 일상 중에서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뿐더러 그녀에게도 아내로서의 삶, 엄마로서의 삶, 여자로서의 삶이 아닌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이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 아내의 일기에 친절하게 해석을 달아가는 남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때로는 아내를 이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편으로서 변명하기도 하면서.

 

애인이 오지 않는 날 애타게 기다리기도 한다. 하지만 오지 않은들 그게 무슨 큰일이랴. 남편이라면 내게 오지 않는 것이 상처를 주겠지만 애인이니 조금의 쓸쓸함만을 남길 따름이다. 신통하게도 아주 변심하여 영원히 와 버릴 애인이 아니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빈처> 중에서-

 

'나'는 씁쓸하다. 아내는 자신을 독신여성에 남편인 '나'를 애인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부부가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있겠는가. 아내가 부부관계를 연인 사이로 설정한 것은 결혼 후 겪었던 남편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애틋한 표현일 것이다. 애인은 매일 만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대한민국 남편들에게 가정이 먼저냐 직장이 먼저냐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없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놓을 수 없지만 그 사이에 아내는 '마누라'로 전락해간다. 아내는 그런 과정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그런 아내의 일기를 훔쳐보는 남편은 새로운 발견 같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

 

분명히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부부의 일상은 사랑을 이루고 나서 겪는 당연한 순서가 돼버린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는 화려한 비탄이라도 있지만 이루어진 사랑은 이렇게 남루한 일상을 남길 뿐'이라는 아내의 일기를 통해 저자는 부부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다.

 

9월16일

……

등 뒤에서 민영이는 잠이 들었는지 자꾸만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몇 번이나 포대기를 풀어 아이를 단단히 업어야 했다. 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샀다. 나는 한 손으로는 자꾸 미끄러지는 아이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소주를 병째 마시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단숨에 건너편 아파트 단지까지 갔다 오고도 나는 피로한 줄을 몰랐다. 술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따위 술기운이 내 꼴을 내가 보는 자괴감을 마비시켜줄 리는 없었다. -<빈처> 중에서-

 

'나'는 명치께가 아파오고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아내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내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독신이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 술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아내가 이토록 외로워했다는 것을 '나'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주인공 '나'는 가정과 직장 어느 것도 소홀할 수 없는 대한민국 평균 남편이다. 저자는 소설 속 '나'처럼 결혼과 가정이라는 제도 안에서 아내들은 별문제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무지의 소산임을 깨닫게 해주는 데 소설의 방점을 두는 듯 싶다. 남편들에게도 고단한 일상이 있듯이 대한민국 평균 아내들에게도 남편만큼의 그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양성 평등이니 여성의 사회적 위치니 하는 말들은 차후의 문제인 것이다. 

 

한편  소설 속 아내는 늘 남편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일기장을 놓아둔다. 소설을 다분히 작위적으로 느끼게도 하지만 저자의 분명한 의도가 숨어있는 설정이지 싶다. 아내는 남편이 볼 수 있는 곳에 일기장을 둠으로써 자신이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자연스럽게 남편이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남편이 쉽게 볼 수 있는 일기장은 아내와 남편이 소통할 수 있는 도구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부부 관계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소통 부재의 현대인들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인지도 모른다.

 

은희경의 <빈처>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소설이 하나 있다. 현진건의 <빈처>다. '가난한 아내', '가난한 남편의 아내'라는 의미의 동명소설에서 70~80년의 시차가 만든 의식변화를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비단 필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제도와 환경과 의식의 변화보다 오히려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비루할 수밖에 없는 소시민들의 삶에서 적잖은 절망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내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을 삺보기 전에 혹시나 읽어보지 않은 독자들이 있을까 싶어 현진건의 <빈처>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현진건의 <빈처>는 1921년 「개벽」에 발표된 소설이다. 주인공 '나'는 이름없는 작가다. 비록 글쓰기는 하고 있지만 수입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무명작가인 '나'는 아내의 옷가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얻은 돈으로 살림을 꾸려나간다. 어느날 장인 생일에 아내는 입고갈 옷이 없다. 당목옷을 꺼내입고 친정에 가는 아내를 보는 '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게다가 아내는 처형이 사준 새 신을 내키지 않은 듯 받아든다. 하루하루 고달픈 아내지만 '나'가 출세해서 기쁘게 해주겠다는 말에 아내도 기꺼이 응원해준다. 궁한 살림에도 늘 가난한 '나'를 응원해주는 아내를 보며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은희경이나 현진건 소설 모두에서 아내는 초라하고 소외된 존재다. 그러나 아내가 그렇게 된 원인은 차이가 있다. 현진건의 <빈처>에서 아내는 1920년대 시대적 상황을 살아가던 보통의 아내들을 상징한다. 남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지만 가부장적 전통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살아가던 순종적인 아내다. 반면 은희경의 <빈처>에 등장하는 아내는 경제적 궁핍보다는 남편으로부터의 소외, 사회로부터의 소외에 갈증을 느끼고 있지만 현진건 소설 속에서의 아내와 달리 소극적이긴 하지만 일기를 통해 현실 극복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두 소설 다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은 애틋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그 시선의 강도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현진건의 <빈처>에서 남편은 가부장적 사회의 틀에서 바라보는 시혜적 연민이라면 은희경의 소설에서는 아내와 남편, 여성과 남성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은희경의 <빈처>에서는 일기라는 다소 소극적 형식이긴 하지만 아내가 겪고 있는 소외와 단절의 감정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두 소설 모두 남편인 '나'가 바라보는 아내임에도 저자가 하나는 여성이고 하나는 남성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대상인 '아내'를 이해하는 강도는 분명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요즘은 결혼도 이혼도 자유로운 시대가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아무리 열린 사회라 부르짖지만 부부 사이건 부부 관계의 파탄인 이혼이건 여성이 사회적 약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가정과 아내와 자식들에게 소홀한 남편을 전적으로 비난만도 할 수 없다. '가난한 아내', '빈처'는 시대를 거슬러 경제적인 환경이 적지않은 몫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내의 일기를 본 '나'의 감상처럼 엄숙한 일이 아닐까.

 

아이를 안은 채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피곤에 절어 있다. 뒤로 묶은 머리가 머리핀 사이로 잔뜩 빠져나와 어수선하다. 나는 손에 펴 들고 있던 그녀의 일기장을 가만히 덮어둔다. 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빈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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