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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아내의 상처를 치유한 남편의 결정적 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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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손가락/함정임/1995년

 

어릴 적 살았던 시골집 흙벽에는 한 눈에 봐도 대여섯 살 아이의 작품으로 보이는 그림이며 낙서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 위에 흙만 한 번 바르면 될걸 어찌된 일인지 사는 내내 지워지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빛만 바래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흙벽 낙서의 주인공은 내가 두 살 때 죽은 네살 터울의 형의 작품이었다. 아이들이 죽으면 동네 어른들이 나서서 부모가 모르는 곳에 돌무덤을 만들어 매장하는 풍습 때문이었던지 어머니는 그 낙서를 통해 죽은 형을 기억하려 했고 또 그 낙서 때문에 자식 잃은 슬픔이 불현듯 떠오르곤 했던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슴 깊숙한 곳에 상처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타인의 시선으로야 상처의 패인 자국이 크든 작든 당사자에게는 하루하루가 인고의 세월이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게 마련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곪아가면서 현재를 지배하기도 한다. 아물지 않은 상처는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기도 한다. 상처는 기억의 공간을 배회하기도 하지만 몸뚱아리 어느 부분에 새겨져 작은 충격에도 일상을 지배하기도 한다.

 

함정임의 소설 <병신 손가락>은 과거의 아픈 기억이 배어있는 흉터를 가진 부부가 사랑을 통해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상처       

 

아내에게는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않은 상처가 하나 있다. 심지어 남편에게도. 왼손 네 번째, 결혼반지를 끼는 손가락의 손톱이 딱딱하게 이지러져 있다. 애써 숨기지 않는 척 하지만 아내는 결혼할 때까지 숨박꼭질을 해야만 했다. 아내의 손가락 콤플렉스를 어느날 남편이 알게 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누구나 외모 콤플렉스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내가 어느날 남편에게 병신 손가락을 들키고 몰래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손톱에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이 그저그런 콤플렉스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에게 그토록 들키지 않으려는 데는 손톱에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을 통해 아픈 과거가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은 현재를 과거의 그늘 속에 갇혀있게 한 매개체가 된다. 물론 남편에게도 그런 흔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외모 콤플렉스를 대하는 이 부부의 태도는 전혀 상반된 방식으로 표출된다. 

 

아내의 손톱 콤플렉스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연결되어 있다. 그 중심에는 광인이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 자리잡고 있었고, 엄마와 같은 삶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아내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손톱에 난 흔적들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사별한 엄마는 늘 술에 절어 살았다. 아내의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엄마의 가족사까지도 들춰낸다. 전쟁 통에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한 삼대독자였던 외삼촌, 월남전에 아들을 여읜 어미의 한을 자살로 자살로 표출된 이모, 엄마에 대한 아내의 기억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오롯이 담고있다. 엄마가 광인이 된 데는 큰엄마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즉 엄마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었던 것이다. 아내가 그토록 큰엄마를 증오하며 평생을 살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남편은 냄새를 맡지 못한다. 어릴 적 겨울이면 성에가 두텁게 낀 산동네 집 창문 밑에서 잠을 자서 코가 얼어서 입술 가까이까지 콧부리가 내려와 있다. 아내와 달리 남편은 자신의 코 콤플렉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놓고 산다. 물론 남편이 그렇게되기까지는 고단한 세월을 거치고 난 후에야 가능했다.

 

그는 자기의 흉터에 대해 특히 약점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자랑스럽게 까발리곤 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자기의 상처들을 객관화시킬 수 있기까지 오래도록 자폐의 시절을 보내야 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왠지 그 앞에서 주눅 두는 기분에 번번이 할 말을 잃고 소외감을 느꼈다. 누군들 상처가 없겠는가. 그와 나는 어쩌면 상반되게 간직한 서로의 상처에 홀린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홀리는 것과 속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아니 상처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병신 손가락> 중에서-

 

치유

 

과거의 아픈 기억에 갇혀 사는 사람들의 현재는 흔히 두가지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하나는 남편처럼 자폐의 시절을 보낼만큼 아픈 기억을 부단한 노력으로 극복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과거를 떨쳐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다. 다행히 아내는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아픈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을 통해 내면의 사랑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상처가 치유됨을 깨닫게 된다.

 

그의 옆에 누울 때마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욱 깊이 인식할 뿐이었다. 그것은 내가 병신 손톱을 감추려고 하는 한 나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이며 나 또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이었다. 깊이 사랑하는 자만이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던가. -<병신 손가락> 중에서-

 

아내의 깨달음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콤플렉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까발리며 유쾌하게 생활하는 남편의 행동이 단초가 되긴 했지만 더 결정적인 한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의 배꼽이었다. 그것도 여느 배꼽처럼 우묵하게 파인 것이 아니라 참외 꼭지가 떨어진 흔적처럼 얕고 동그란 남편의 배꼽. 남편은 누우면 배꼽을 만지는 버릇이 있었고 또 아내가 만져주기를 원하곤 했다. 남편의 그런 버릇은 어린 시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만지던 것이 원인이 되었다. 아내는 남편의 배꼽을 보며 세상에서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엄마와 태아를 연결시켜 주었던 탯줄을 잘라 생긴 흔적인 배꼽을 아내는 '태초의 흉터'로 인식하게 되고 비로소 상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주 평범한 과거의 흔적,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속깊게 표현된 예전의 상처임을 깨닫고는 손톱에 남아있던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치유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상처는 감추는 게 아니라 서로 드러내놓아야만 아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홍수, 강둑을 부수고, 벽을 뚫고, 도시를 허물어 떠내려 보내는 강력한 물의 이동, 대홍수의 장관이었다. 거침없이 흘러가는 시뻘건 황톳물 위로 형체를 알 수 없는 딱딱한 응어리들이 거품이 되어 피어올랐다. 거품은 떼 지어 몰려들어 연꽃을 이루는가 싶더니 산산이 흩어졌다가는 다시 물 항아리로 떠올랐다. 나는 일렁이는 물들의 결을 따라 기나긴 마취의 세계에서 깨어나듯이 느리게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병신 손가락> 중에서-

 

우리는 짧은 현대사에 어떤 나라보다 아픈 상처들을 많이 지니며 살아왔다. 일제 강점기, 해방공간에서의 좌우 대립, 한국전쟁, 4.19 의거, 5.18 민주화 운동, 6.10 항쟁에 이르기까지 개인들의 상처는 동력이 되어 오늘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들의 상처는 사회의 상처가 되었고 이 상처는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숨기기에 급급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무는 게 아니라 곪아 터지는 법이다. 상처는 드러내놓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치료방법을 찾아가야만 한다. 곪아 터지기 전에. 저자가 <병신 손가락>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성을 가지고 개인의 상처를 들어주고 어루만져 줄 때 질곡의 역사는 비로소 미래의 성장동력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의 단절은 시간적, 물리적 단절이 아닌 과거의 상처를 들춰내서 치유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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