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혁명

(4)
쇼팽의 심장은 조국과 첫사랑에 바친 사랑이었다 ‘즉흥 환상곡’으로 유명한 쇼팽(Fryderyk Franciszek Szopen, 1810~1849)은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했던 음악가 중에 한 명으로 폴란드 태생이었지만 주 활동무대는 프랑스였다. 폴란드 출신이었지만 폴란드 오페라를 단 한 곡도 작곡하지 못했다. 또 그가 조국을 떠나 활동했던 시기는 러시아에 대항해 폴란드인들의 저항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때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쇼팽이 죽었을 때 폴란드 망명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그에게 깊은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쇼팽은 184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파리의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쇼팽의 시신에는 심장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영화 '쇼팽, 사랑의 열망'(2002) 중에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쇼팽에게는 생전에 두 명..
아Q의 정신승리법은 21세기 중국에도 있다 루쉰(1881년~1936년)의 /1921년 이 남자가 사는 법은 독특했다. 건달들에게 변발을 잡히고 실컷 두들겨 맞은 후에도 “나는 자식에게 맞은 셈 치자,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야……”라고 생각하고는 스스로 만족해 하며 의기양양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자기 뺨을 힘껏 때리고는 때린 것이 자기라면 맞은 것은 또 하나의 자기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에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으로 간주했다. 맞는 ‘나’와 때린 ‘나’를 분리하니 분노와 굴욕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자기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니 그에게는 패배란 있을 수 없었다. 소위 ‘정신승리법’이라 불리는 이 남자의 사는 법은 금세 사람들에게 노출됐고 이 남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마다 이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분노도 ..
판타지로 읽는 어느 아나키스트의 꿈 신채호(1880~1936)의 /1928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씨가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땅 찾기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하고 있는 현실과 반대로 남편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신채호 선생의 아들임을 밝히기 위해 기나긴 법정투쟁을 벌여야만 했던 현실을 개탄하며 한 말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국이 광복된 지 64년이나 지난 2009년에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다. 앞서 1986년 호적을 취득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자부심에 살았어야 할 신채호 선생 후손이 자부심 대신 사치를 얘기한 현실에 가슴 아플 뿐이다. 20세기 초 1,2차 세계대전..
체 게바라는 왜 콩고로 갔을까? 혁명, 열정, 이상주의의 상징인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였다. 그는 입을 열 때마다 ‘체(che)'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체 게바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완성한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 총재, 기업 국유화와 토지개혁 단행 당시 공업부장, 쿠바를 소련의 핵무기 계획에 포함시키는 협정의 쿠바 협상대표 등을 역임했으나 1965년 4월 갑자기 쿠바를 떠났다. 수개월 후 모습을 드러낸 게바라는 콩고에서 무장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왜 모든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혁명에 다시 뛰어들었을까? 역사는 미스터리이다. 이 미스터리가 아니었다면 인류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인류의 삶을 지배해 온 전쟁의 역사에서 영웅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