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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3.24 글라우코스, 전쟁에서 핀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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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우코스(Glaucus)는 그리스 신화에서 흔히 언급되는 이름이지만 리키아의 왕 글라우코스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에 등장한다. 리키아의 왕 글라우코스는 트로이 편에 선 장군 중 한 명이었다. 글라우코스는 히폴로코스의 아들이었고 따라서 그리스 영웅 벨레로폰의 손자가 되었다. 히폴로코스는 아들 글라우코스에게 트로이 전쟁에 참전해 조상들의 명성을 뛰어넘으라고 명령했다.

 

글라우코스와 디오메데스

 

글라우코스는 트로이 방어에서 가장 유명한데 그는 리키아 군의 부사령관이었고 제우스의 아들 사르페돈이 총사령관이었다. <일리아드>에서 글라우코스는 트로이 전투 명령서에 이름이 나와 있다. <일리아드>에 따르면 사르페돈과 비할 데 없는 글라우코스는 리키아인들의 지휘관이었고 소용돌이치는 크산토스(현재 튀르키예 남서부에 있는 고대 리키아의 도시)에서 왔다고 한다. 트로이 전투 명령서는 결코 포괄적이지 않으며 <일리아드>에 나오는 많은 내용들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목록의 마지막에 글라우코스와 리키아인들이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을 돕기 위해 가장 먼 곳에서 온 동맹이었다는 표현이 있다. 아폴로도로스(Apollodorus. 기원전 180년경~120년경.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문법학자)는 글라우코스와 사르페돈이 전쟁이 시작된 지 9년 후에 도착했다고 기록했다.

 

한 전투에서 아카이아의 영웅 디오메데스는 글라우코스를 만났다. 글라우코스는 벨레로폰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아카이아 군대의 누구와도 맞서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말을 들은 아카이아의 영웅 디오메데스는 두 사람은 무기를 내려놓고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할아버지인 오이네우스와 벨레로폰은 친구였고 그 우정은 이제 유전되기 때문이었다. 글라우코스는 동의했고 디오메데스를 편애하는 아테나는 글라우코스가 그들의 갑옷 교환에 동의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거래는 성급했다. 디오메데스의 청동 갑옷은 소 9마리의 가치가 있는 반면 글라우코스의 황금 갑옷은 소 100마리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메로스(Homer. 기원전 8세기경.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는 글라우코스에게 죽은 아카이아인을 한 명만 언급했는데 이피노오스는 글라우코스의 창에 어깨를 맞고 전차에서 떨어져 죽었다. 글라우코스는 트로이인들이 그리스 방어벽을 공격했을 때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사르페돈과 함께 싸우면서 리키아인들의 용기와 기술은 헥토르가 그리스 방어벽을 돌파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글라우코스가 성벽의 틈새에 다다르자 이 리키아의 왕은 테우케르가 쏜 화살에 맞았다. 글라우코스가 전선에서 물러나자 사르페돈은 아킬레스 갑옷을 입은 파트로클로스와 마주쳤다. 파트로클로스는 이어지는 싸움에서 사르페돈을 죽이고 사르페돈이 죽자 그는 글라우코스에게 그의 시신을 가져오라고 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사르페돈의 시신은 아카이아인들의 전투 중심에 있었고 글라우코스는 부상을 입었다. 글라우코스는 아폴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폴론은 글라우코스의 상처를 치료했고 글라우코스는 다시 전투에 나섰다. 그 후 신들은 사르페돈의 시신을 가져갔지만 그의 갑옷은 아카이아 군대에 빼앗겼다.

 

나중에 아카이아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놓고 비슷한 싸움이 벌어졌다. 글라우코스도 여기에 있었지만 이것은 리키아인의 마지막 싸움이 되었고 그는 아약스 대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글라우코스의 시신은 아이네이아스가 가져갔다. 글라우코스를 위한 화장용 장작더미가 트로이의 다르다니아 문 앞에 세워졌지만 불이 글라우코스의 몸에 닿기 전에 아폴로가 그의 시체를 옮겨 리키아로 가져갔고 그곳에서 화강암 바위 아래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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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강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