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안타이오스(Antaeus)는 리비아의 거인(기간테스)으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땅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이다. 그 나라를 지나가는 모든 이방인들은 그와 강제로 레슬링해야만 했다. 안타이오스가 땅에 발을 딛고 있을 때 그의 힘은 최고조에 달했다. 즉 땅을 딛고 있는 한 그는 무적이었다. 헤라클레스는 그와 싸우면서 그의 힘의 원천을 발견하고 그를 땅에서 들어 올려 짓밟아 죽였다. 고전 시대의 많은 예술 작품이 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의 레슬링 경기를 보여주지만 이탈리아 타렌툼에서 나온 헬레니즘 시대 동전보다 먼저 헤라클레스가 안타이오스를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기원전 43년~기원후 17년. 고대 로마의 시인)는 그의 저서 <변신>에서 안타이오스의 힘이 땅과의 접촉에서 나온다고 묘사한 최초의 저자이다.
안타이오스는 포세이돈과 가이아의 아들로 리비아 사막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거대한 외모를 가진 강력한 전사였다. 그는 또한 잔인해서 이방인들을 레슬링 경기에 강제로 참여시켰고 그 경기는 언제나 이방인의 죽음으로 끝났다. 안타이오스는 그의 발이 땅에 닿아 있는 한 사실상 무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헤라클레스에게 결국 패배했다. 결국 표준 전통이 된 이 이야기에서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땅과 더 이상 접촉하지 않도록 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안타이오스의 무적 상태를 우회할 수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른 무서운 괴물들처럼 거칠고 폭력적인 안타이오스는 그리스인들이 외국의 ‘야만인’을 어떻게 보았는지 가장 잘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많은 괴물들처럼 안타이오스는 결국 그리스의 영웅적 가치와 문명의 위대한 옹호자인 헤라클레스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안타이오스는 모로코와 튀니지의 베르베르족에게 문화 영웅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들에게 안티(Anti)로 알려졌다.
안타이오스라는 이름은 ‘반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반대’를 의미하는 전치사 ‘안티(Anti)’와 ‘반대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안티아오(Antiao)’가 있다. 이 단어들은 다시 ‘정면’을 의미하는 인도유럽어 ‘*h₂ent-‘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안타이오스는 ‘상대방’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안타이오스는 북아프리카 리비아 지역의 거대한 레슬러였다. 일부 고대 자료에서는 그의 위치를 그대로 두었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안타이오스의 집을 이라사(서이집트 키레네에서 멀지 않은 곳), 릭소스 강(아마도 현대의 모로코 드라 강) 근처 또는 탕헤르(모로코 북부의 고대도시로 때로는 안타이오스가 세웠다고 함) 등에 있었다고 더 세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안타이오스는 매우 거대하고 강한 창조물로 묘사되었다. 고대에는 리비아에서 발굴된 것으로 추정되는 2.7미터 길이의 해골이 안타이오스의 거대한 유해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안타이오스는 숙련된 레슬러였고 때로는 레슬링을 예술의 경지로 올린 주요 혁신가 중 한 명으로 묘사되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안타이오스는 일종의 철제 원반인 솔로를 던지는 데도 능숙했다. 헤라클레스가 안타이오스를 죽인 후 그는 솔로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헤라클레스는 나중에 펠레우스에게 솔로를 주었고 펠레우스는 다시 그것을 그의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안타이오스의 가장 유명한 속성은 그의 부분적인 무적이었다. 보다 대중적인(하지만 다소 늦은) 전통에 따르면 안타이오스는 땅과 접촉하고 있는 한 무적이었다. 이는 땅을 구현한 여신인 그의 어머니 가이아의 선물이었다. 이 힘 덕분에 안타이오스는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적어도 헤라클레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안타이오스는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인기 있는 주제였으며 나중에 에트루리아와 로마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꽃병 그림, 부조, 조각품, 벽화 및 조각된 보석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술가들은 안타이오스를 매우 거대하고 근육질의 몸을 가진 창조물로 묘사했다. 그의 야만적이고 거친 본성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종종 털이 많은 것으로 묘사되었다. 안타이오스는 기원전 6세기 초부터 예술에 등장했다. 헤라 신전의 메토프(도리아 건축 양식의 프리즈에서 두 개의 트리글리프 사이에 위치한 사각형의 패널)에 안타이오스가 묘사되어 있다. 그는 거의 항상 헤라클레스와의 운명적인 싸움에서 등장했다.
안타이오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대지를 의인화한 태초의 신 가이아의 자식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피그미족의 형제가 되었는데 피그미족은 이 두 중요한 신의 결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안타이오스의 아내는 초기 문학에서 이피노에(Iphinoe)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후대의 기록에서는 그녀를 탕헤르 시의 이름과 동일한 또는 기원이 되는 팅게(Tinge)로 불렸다. 안타이오스와 그의 아내는 알케이스(Alceis)라는 딸을 두었다.
안타이오스 신화는 때때로 그리스와 리비아의 접촉의 결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와 리비아의 관계는 처음에는 우호적이었지만 북아프리카의 그리스 식민지 키레네의 세력이 커지면서 기원전 6세기 중반에 두 문명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긴장된 분위기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리비아 안타이오스의 탄생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안타이오스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불경한 괴물로 그리스인들이 야만스러운 리비아인과 연관시킨 거친 특성을 구현한 창조물이다.
안타이오스는 헤라클레스가 모험을 하는 동안 싸워서 물리친 잔혹한 상대 중 한 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안타이오스는 자신의 땅에 온 낯선 사람들을 강제로 레슬링 경기에서 마주하게 했다. 그가 상대를 물리쳤을 때 그는 그들의 두개골을 사용하여 아버지 포세이돈의 신전을 장식했다. 헤라클레스는 12가지 과업 중 하나를 실행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갔을 대 안타이오스를 만났다. 안타이오스는 이전에 이방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이 영웅에게도 레슬링을 강요했다. 하지만 이것은 안타이오스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가 땅과 닿아 있는 동안 무적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고 이어서 그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로마의 서사시인 루칸(Marcus Annaeus Lucanus. 39년~65년)은 헤라클레스가 땅을 차지하려고 애쓰는 거인을 높이 들어올린 방법을 설명했다. 대지(가이아)는 죽어가는 아들의 몸에 힘을 전달할 수 없었다. 알키데스 즉 헤라클레스가 땅과 안타이오스 사이에 서서 이미 차가운 장애물로 굳어진 가슴을 움켜쥐고 오랫동안 안타이오스를 땅에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를 죽인 후 안타이오스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했고 심지어 그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가장 초기의 전통에서 안타이오스의 아내는 이피노에라는 이름을 가졌고 헤라클레스와의 사이에서 팔라에몬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나중에 안타이오스가 리비아 문화의 영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안타이오스의 아내는 팅게(탕헤르의 동명)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헤라클레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후기 문학에서 팔라에몬이 아닌 소팍스라고 불렸는데 마우레타니아(지금의 모로코 북부와 알제리 중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모리타니 이슬람 공화국의 어원이 되었다) 왕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안타이오스는 곧 다양한 북아프리카 사람들의 종교와 신화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23~30년)에 그는 이집트 신 세트와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안타이오스 숭배 중심지는 상 이집트 테부(지금의 카우 엘 케비르)로 안타이폴리스로 알려졌다. 이곳은 세트와 이시스가 싸운 곳이기도 하다. 안타이오스는 특히 특히 베르베르족의 신화에서 중요한 신이었으며 그들은 안타이오스를 안티라고 불렀다. 안타이오스는 서양 문화에서 중요한 창조물로 남아 있으며 단테의 <신곡>에도 등장한다. 그는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영화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 신’ 시리즈에서 퍼시 잭슨과 싸우는 반거인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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