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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아들이 어머니 몰래 눈물을 흘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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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이청준(1939~2008)/1977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이 있다어떤 조직이나 모임에서건 꽉 차 있을 때는 개인의 존재감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가 빠진 듯 한쪽 구석이 횡 하니 비어 있을 때는 비로소 개인의 부재가 느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스포츠에서 '난 자리'는 전력 누수로 이어지고 여타 조직이나 모임에서도 '난 자리'의 등장은 효율이 비효율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되곤 한다. 부재란 그렇게 현실로 다가올 때만 느낄 수 있는 인간 감각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든 자리' '난 자리'의 결정적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난 자리' 존재가 간절해 지고 때로는 죄책감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바로 가족이다. 그게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면 더더욱 그렇다

 

어머니에게 빚 진 게 없다는 아들과 평생 아들에게 빚 지고 사는 어머니

 

나도 그랬던 것 같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살가운 대화를 못해 봤던 아버지의 죽음. 사실 내 일상은 그 전이나 후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아버지의 부재가 내 일상에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는 일상에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점점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 나갔고 그 공간은 후회와 회한으로 다져진 덩어리로 변해 갔다. 마치 암 덩어리처럼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으니 순간순간 통증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살이 애이도록 아픈 통증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통증은 살을 찢는 고통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 하지는 않았다. 부모와 자식간의 이 신비한 감각,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지만 더 처참하게 도드라지고 살이나 뼈로 느껴지지 않는 고통이지만 더 참을 수 없이 아픈 이 감각의 실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청준의 소설 <눈길>에서 이 감각의 실체는 어머니에게 진 빚이 없다던 아들이 어머니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사진>김천인터넷뉴스 

 

오랫만에 고향집을 찾은 ''는 어머니의 말과 태도에서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껴 서둘러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심지어 ''는 어머니를 '노인'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와 어머니 사이에는 얼마나 깊은 골이 패어 있었길래 어머니를 '노인'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서로 빚 진게 없다고 생각하는 에게 어머니가 꺼낸 지붕 개량 사업 얘기는 노인의 엉뚱한(?) 꿈이었고 는 내심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어머니는 다른 뜻이 있었을텐데 의 어머니에 대한 불편함은 그런 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와 군영 3년을 치러 내는 동안 노인은 내게 아무것도 낳아 기르는 사람의 몫을 못했고, 나는 또 나대로 그 고등학교와 대학과 군영의 의무를 치르고 나와서도 자식 놈의 도리는 엄두를 못 냈다. 노인이 내게 베푼 바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럴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형이 내게 떠맡기고 간 장남의 책임을 감당하기를 사양치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인과 나는 결국 그런 식으로 서로 주고 받을 것이 없는 처지였다. 노인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대해선 소망도 원망도 있을 수 없었다. -<눈길> 중에서-

 

모성애라는 이름의 아주 특별한 사랑

 

아내가 없었다면 와 노인(어머니)는 영원히 서로 빚 진 게 없는 사이가 될 뻔 했다. 아내의 적극적인 화해 노력으로 는 그 동안 알지 못했던 비밀들을 하나 둘씩 알게 되고 어머니 또한 지금껏 감추고 살아왔던 속내를 드러내게 된다. 옷궤와 눈길 이야기가 그것이다. 지금의 어머니 단칸방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 옷궤는 가 어머니에게 빚이 없음을 몇 번씩 스스로 다짐하다가도 무슨 액면가 없는 빚 문서를 만난 듯 기분이 새삼 꺼림칙스러워지던 물건이었다. 그 새벽의 눈길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의 피안으로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그날 새벽의 동행이었다.

 

K시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는 겨울방학에 옛 살던 집을 찾았지만 형의 술버릇 때문에 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집은 남에게 팔리고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새 주인에게 부탁해 안방 한쪽에다 이불 한 채와 옷궤 하나를 예대로 그냥 두고 를 기다렸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옷궤 한 가지나만 옛집 살림살이의 흔적으로 남겨서 나의 괴로운 잠자리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다음 날 는 다시 K시로 돌아가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눈길을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여기까지는 못내 불편하지만 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내에게 들려준 그 다음 이야기는 어머니만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비로소 와 어머니 사이에 깊게 패였던 골이 메워지는 역할을 한다. 어머니는 를 보내고 다시 눈길을 따라 되돌아가면서 느꼈던 회한을 아내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간절하다 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어졌지야. 그래서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나하곻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눈길> 중에서-

 

에게 눈길은 집안의 몰락과 자수성가해야 하는 운명을 떠올리는 쓰라린 기억이지만어머니에게 눈길은 자식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매개물이었다. 어머니가 지붕 개량을 하고 방 한 칸 더 늘리고 싶었던 것도 당신의 죽음에 대비해서 자식들이 오면 묵을 따뜻한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자는 척 듣고 있던 는 아내가 깨우는데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꺼풀 밑으로 뜨겁게 차오르는 것을 아내와 어머니에게 보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는 어머니를 원망하며 서로 빚 진 게 없다는 마음으로 살아왔건만, 어머니는 평생 자식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죄책감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속으로만 삼키며 살아왔던 것이다. 우리네 모두의 어머니가 다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모성애라는 이름의 아주 특별한 사랑, ‘속으로만 삭혀왔던 아버지의 사랑난 자리가 생겨야 비로소 깨닫는 나를 비롯한 세상의 자식들에 비하면 소설 속 주인공 의 뒤늦은 후회와 눈물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값진 삶의 여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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