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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현대인은 왜 탈출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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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1907~1942)/1936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시작된 산업화는 섬유나 의류봉제공업 등 경공업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경공업이 발전하기 위한 핵심은 충분한 인력 공급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농촌은 산업화 시대 도시에 생긴 국가공단의 주요 인력 공급처였다. 너나 할 것 없이 도시로 떠났다. 도시 변두리가 농촌에서 올라온 젊은이들로 넘쳐나는만큼 농촌은 노인들과 빈집들만이 늘어났다. 산업화라는 명목으로 농촌은 국가정책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무시되었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더 이상 농촌 마을에 내걸린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깃발이 아니었다. 농촌경제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전통은 구시대 악습 취급을 받았다. 더 이상 농촌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미래가 아니었다. 

 

이랬던 농촌이 지금은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낭만의 대상이 되고 있다. 너도 나도 전원 생활을 꿈꾸며 자연 예찬에 침이 다 마를 정도다. 이효석의 소설 <산>의 주인공 중실도 그랬다. 중실에게 산은 걱정 없고 아름다운 세상이다. 과연 중실에게 산은, 자연은 진심으로 그런 세상이었을까?

 

산속의 아침나절은 졸고 있는 짐승같이 막막은 하나 숨결이 은근하다. 휘엿한 산등은 누워 있는 황소의 등어리요, 바람결도 없는데, 쉴새 없이 파르르 나부끼는 사시나무 잎새는 산의 숨소리다. 첫눈에 띄는 하아얗게 분장한 자작나무는 산속의 일색. 아무리 단장한 대야 사람의 살결이 그렇게 흴 수 있을까? 수북 들어선 나무는 마을의 인총보다도 많고 사람의 성보다도 종자가 흔하다. 고요하게 무럭무럭 걱정 없이 잘들 자란다. 산속은 고요하나 아름다운 세상이다. 과실같이 싱싱한 기운과 향기, 나무 향기, 흙냄새, 하늘 향기,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향기다. -<산> 중에서-

 

▲김기창 화백의 '가을'. 현대인들은 이런 농촌 풍경에서 고단함보다는 낭만을 느낀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귀농을 꿈꾸고 있고 실제로 귀농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노후의 전원생활은 누구나 꿈꾸는 생의 마지막 낭만이다. 하지만 귀농에 성공하고 전원생활에 정착하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한없이 낭만적으로만 보이던 자연과 현실의 자연(농촌)은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크나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연으로의 회귀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또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도시인)들은 왜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는 것일까?

 

문명의 이기가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세상이다. 안방에서 원클릭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문명의 이기는 현대인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문명의 이기는 현대인에게 편리함은 주었을망정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문명의 이기로치면 한참 뒤떨어졌을 부탄이라는 작은 나라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는 통계도 있다. 산속 생활을 걱정 없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는 소설 <산> 속 중실도 사실은 현실 도피의 종착점이 자연이었다.

 

세상에 머슴살이같이 잇속 적은 생업은 없다. 싸우려고 싸운 것이 아니라 김 영감 편에서 투정을 건 셈이다. 지금 와 보면 처음부터 쫓아낼 의사였던 것이 확실하다. 중실은 머슴 산 지 칠 년에 아무것도 쥔 것 없이 맨주먹으로 살던 집을 쫓겨났다. 원통은 하였으나 애통하지는 않았다. 해마다 사경을 또박또박 받아 본 일이 없다. 옷 한 벌 버젓하게 얻어 입은 적 없다. 명절에는 놀이할 돈도 푼푼이 없이 늘 개 보름 죄듯 하였다. 장가들이고 집 사고 살림을 내준다는 것도 헛소리였다. 첩을 건드렸다는 생뚱 같은 다짐이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계책한 억지요, 졸색의 등글개 따위에는 손댈 염도 없었던 것이다. -<산> 중에서-

 

▲현대인은 왜 탈출을 꿈꾸는가 

 

국제노인인권단체가 발표한 '2014 세계 노인복지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복지는 세계 50위 수준으로 필리핀이나 베트남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게다가 노인빈곤율은 거의 50%에 육박해 OECD 회원국 중 단연 으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복지를 대놓고 말할 수도 없는 세상이 되고 있다. 복지를 말하면 한쪽에서는 좌파니 종북이니 하는 주홍글씨를 새기기에 바쁘다. 노인뿐만 아니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늦은 나이가 되도록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좋은 일자리'라는 명분으로 양산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수백만에 육박했고 생활임금도 안되는 최저임금으로 사는 노동자가 또 수백만이다. 하지만 국가는 다수의 팍팍한 삶을 개선하기보다는 소수의 행복을 지켜주기에 여념이 없다. 현대인은 떠나고 싶다. 자연이 이런 비루한 삶을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과연 그럴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말이다.

 

현대는 자아상실의 시대다

 

현대인이 탈출을 꿈꾸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어디에서도 '나'를 찾을 수 없는 상실감과 무력감 때문이다. 누구누그의 아내로 또는 엄마로 살면서 자신의 이름은 잊어버렸던 여성의 삶이 지금은 현대인의 그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성인이 되기까지 계량화된 성적으로 줄서기를 하다 정작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고민은 잊어버린다. 성인이 되어서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처럼 '나'로 살기보다는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끊임없이 문명의 이기만 양산해 낸다. 심지어 '나'를 조용히 돌아볼 시간인 황혼기마저 직업 전선으로 뛰어들어만 하는 게 현대인의 일생이다. '우리'는 있지만 '나'는 없다.

 

'나'를 잃어버린 많은 현대인들이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런 현대인이 앓고 있는 현대병은 개인을 떠나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된 자아의 '치유' 공간으로 여긴다. 탈출하고 싶은 현대인의 꿈은 문명화가 가속될수록 더 크게 영글어갈지도 모른다. 막연한 기대감과 희망 때문에 자연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다시 팍팍한 도시로 되돌아오는 현대인들도 적지 않다. 그래도 현대인은 탈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인간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낸 현실은 현대인의 탈출을 연신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굵은 나무를 베어다 껍질째 토막을 내 양지쪽에 쌓아 올려 단칸의 조촐한 오두막을 짓겠다. 펑퍼짐한 산허리를 일궈 밭을 만들고 봄부터 감자와 귀리를 갈 작정이다. 오랍뜰에 우리를 세우고 염소와 돼지와 닭을 칠 터. 산에서 노루를 산 채 붙들면 우리 속에 같이 기르고 용녀가 집일을 하는 동안에 밭을 가꾸고 나무를 할 것이며, 아이를 낳으면 소같이 산같이 튼튼하게 자라렷다. 용녀가 만약 말을 안 들으면 밤중에 내려가 가만히 업어 올걸. -<산> 중에서-

 

비록 현실도피였지만 어렵사리 정착한 중실의 산속 생활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현대인의 탈출을 응원해 주고 싶다. 그게 아무리 힘들고 고단한 과정일지언정. 중실이 밤 하늘을 별을 세는 동안 제 몸이 스스로 별이 됨을 느꼈던 것처럼 현대인에게도 그런 꿈같은 꿈이 실현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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