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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세계명작단편소설

유기견을 사랑한 이 여인,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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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사까/레오니드 안드레예프(Leonid Nikolayevich Andreyev, 1871~1919, 러시아)/1901년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다. 화려한 겉모습만 보고 열광한 나머지 그녀의 내면에는 터럭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외모와 거침없는 입담으로 뭇 남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이효리의 최근 근황을 보면 아직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게다가 버려진 애완동물들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채식주의자인 것은 진작에 알았지만 그렇다고 동물 사랑이 이 정도일 줄이야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이효리는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동물보호소를 통해 입양한 유기견을 안고 활짝 웃는 모습을 공개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붉게 드러난 잇몸마저 사랑스럽다.

 

이효리가 블로그에 버려진 애완동물들과 찍은 사진을 공개한 것은 유기동물 입양을 독려하기 위해서란다. 그녀의 화려했던 스타 시절만큼이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가 임시로 보호하고 있다는 누렁이 강아지 앨리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앨리는 아직은 사람들이 두렵지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고 있는 사춘기 강아지란다. 짖지도 보채지도 않고 대·소변도 잘 가리는 깔끔이라고 한다. 이효리는 또 '앨리의 새 가족을 찾는다'며 동물보호단체인 생명공감 보호소 사이트에 링크도 걸어두고 있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갔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게 사는 그녀가 브라운관 속에서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지닌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레오니드 안드레예프의 소설 <꾸사까>를 읽으며 불현듯 이효리를 떠올렸다니, 그녀는 또 다른 매력으로 아직도 어느 중년 남자의 마음을 흔드는 진짜 요정이어서가 아닐까?

 

▲사진>이효리 블로그 

 

'사람을 무는 사나운 개'라는 뜻의 '꾸사까'는 떠돌이 개다. 험악하고 표독스러운 이름이지만 주인공인 떠돌이 개가 태어나 처음으로 갖게 된 이름이다. 주인도 없고 이름도 없는 떠돌이 개 '꾸사까'에게 사람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그래서 이 떠돌이 개는 외로움 속에서 사람들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분노를 쌓아간다.

 

그는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았다. 이름도 없었고 길고 길었던 지난 겨울을 어디에서 보냈는지, 무얼 먹고 살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온기가 있는 농가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기는 그와 마찬가지였지만 집이 있다는 이유로 도도하고 강한 동네 개들이 그를 쫓았다. 배고픔과 외로움 때문에 거리에 모습을 드러내면 이내 동네 아이들이 돌멩이와 막대기를 던졌고 어른들은 깔깔대며 그를 놀려대고 무섭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럼 그는 두려움으로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들뛰면서 울타리와 사람에게 부딪치다가 마을 끄트머리로 쏜살같이 달려가서는 큰 과수원 깊숙이 그만이 아는 장소에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그는 상처를 핥으며 외로움 속에서 공포와 분노를 쌓아갔다. -<꾸사까> 중에서-

 

그에게 '꾸사까'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는 어느날 별장에 놀러온 '룔랴'라는 소녀였다. 소녀와의 만남 이후 '꾸사까'는 매일 자신과 사람들 사이에 놓인 거리를 한 걸음씩 줄여 나갔다. 태어나 처음 받아본 사람의 관심과 사랑 때문이었다. 소녀의 애무는 그에게서 강철같은 분노를 앗아가 버렸다. 이제는 누군가가 그를 한 대 발길질로 찬다고 해도 그 사람의 몸에 날카로운 이빨을 꽂을 자신감도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을 향해 늘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방어태세가 소녀로 인해 완전히 무장해제돼 버린 것이다. 

 

방랑하면서 굶주렸던 과거에 굳어진 습관대로 꾸사까는 많이 먹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적은 양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누렇고 까칠하게 축 늘어져 있고 배에는 항상 덕지덕지 흙이 말라붙어 있던 긴 털이 깨끗해지고 까매지면서 지도책처럼 윤기가 나기 시작했다. -<꾸사까> 중에서-

 

하지만 소녀를 만나고부터 찾아온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날 소녀가 별장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혼자가 된 '꾸사까' 앞에 기나긴 외로움의 터널이 놓이게 되었다. 잠시의 행복 뒤에 찾아온 외로움은 그 전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기나긴 가을 밤은 어둠에 휩싸였고 지나간 흔적을 우울하게 비춰 주었던 빛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꾸사까'는 절망감에 울부짖었다. 차라리 소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 외로움은 충분히 견딜 수 있었겠지만 잠시의 행복은 그를 더욱 더 길고 어두운 외로움과 절망의 터널로 내동이치고 있었다.

 

개는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단조롭고, 끈질기며 희망을 상실한 채 평온했다. 그리고 이 울음소리는 그것을 들은 사람에게 빛 한 줄기 새어 나오지 않는 암흑 같은 밤이 빛을 향해 질주하면서 신음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어서 따듯한 곳으로, 환한 불로,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의 가슴으로 뛰어들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꾸사까> 중에서-

 

안드레예프는 소설 <꾸사까>를 통해 '세속의 삶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다. 동물들도 똑같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으면 저자가 떠돌이 개 '꾸사까'를 통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버려진 동물들 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는 인간들도 똑같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언젠가 <노동의 새벽>의 저자이기도 한 박노해 시인 사진전 후원자 중에 이효리도 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브라운관 속 요정이었던 이효리가 중년이 되어서도 '화무백일홍'을 무색케 할만큼 인기 절정일 때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도 대중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되갚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며칠 후면 왁자지껄할 추석이다. 그러나 여전히 팽목항에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의 눈물이 있고, 광화문에는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외침이 있다. 단 일 분이라도 이들의 아픔을 되돌아볼 수 있는 추석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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