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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세계명작단편소설

한밤중 유령 소동, 이보다 더 웃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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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 1809~1852, 러시아)/1842년

 

세상의 별의 별 유령은 다 들어봤지만 이런 유령 이야기는 또 처음 들어본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칼린킨 다리 근처에는 관리 옷차림의 유령이 밤마다 나타나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외투를 강탈한다는 것이다. 참 특이한 취향의 유령이다. 어쨌든 이 유령은 고양이 가죽 외투건, 담비 가죽 외투건, 솜을 누빈 외투건 상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어떤 외투건 보기만 하면 모조리 벗겨 간다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경찰이 유령을 잡았다는 것이다. 황당하기 그지 없지만 사실이다. 더 황당한 것은 잡은 유령을 놓치게 된 사연이다. 유령을 잡은 경찰은 기쁨에 젖어 코담배를 꺼내 잠시나마 여유를 즐기려고 했는데 담배 냄새가 너무 독해 오른쪽 콧구멍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왼쪽 콧구멍으로 담배를 들이마시려는 순간 유령이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담배가루가 경찰의 눈에 들어가 눈을 비비는 사이 유령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외투만 강탈한다는 이 유령이 어느날 시내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대단히 권위적인 어느 고위 간부의 외투를 강탈한 사건 이후였다고 한다. 과연 유령의 정체는…….

 

그의 죽음은 모멸감(?) 때문이었다

 

요즘 '웃프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 말은 인터넷상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신조어로 '웃기다'와 '슬프다'의 합성어라고 한다. 웃기지만 한편으로는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오히려 울고 싶은 상황일 때 '웃프다'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그래도 정확한 뜻을 모르겠다면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외투>의 주인공 아카키예비치를 떠올리면 된다. 앞서 언급한 황당한 유령의 정체가 바로 아카키예비치였다. 가난한 말단직 공무원이었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게다가 외투만 강탈하는 황당한 유령이 되었을까?

 

▲사진>구글 검색 

 

아카키예비치는 외모도 능력도 어디 하나 잘난 구석 없는 서기직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자기 업무만큼은 누구보다 충실했다. 아니 그는 자기 일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그를 조롱하고 비하하기에 바빴다.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 왜 사람을 못 살게 구는 거요!"하고 하소연도 해보지만 소용 없었다. 게다가 아카키예비치의 '거적때기' 같은 외투는 그를 더욱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외모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였지만 북국 특유의 혹한을 '거적때기' 외투로 견디기는 힘들었다. 결국 새 외투를 사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말단직 공무원에게 외투 한 벌 구입이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저녁마다 마시는 홍차도 집어 치우고 밤에는 촛불도 켜지 않고 무엇이든 일을 해야 할 때는 하숙집 안주인네 방에 가서 거기 있는 촛불 밑에서 하기로 했다. 한길을 걸을 때 구두바닥이 빨리 닳지 않도록 돌로 포장을 한 길에서는 되도록 조심스럽게 뒤꿈치를 들다시피 해서 살금살금 걷기로 했다. 그리고 속옷가지를 세탁소에 보내는 횟수도 될 수 있는대로 줄이고 옷이 빨리 해지지 않게 집에 돌아오면 죄다 벗어버리고 두터운 무명 잠옷 하나만 입기로 했다. -<외투> 중에서-

 

웃픈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외투를 구입한 이후의 일이었다. 외투를 구입한 날 저녁, 아카키예비치는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외투를 빼앗기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 구입한 외투인데 그는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사고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경찰 초소를 찾아가 신고했지만 경찰서장을 찾아가 직접 얘기하라는 말만 들었다. 그래서 경찰서장을 직접 찾아갔지만 되레 왜 조심하지 않았냐는 핀잔만 듣고 돌아왔다.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경찰청 고위 간부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대단히 권위적이었던 이 고위 간부에게도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며 엄격한 규칙과 순서에 따라 행동하라는 충고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이 날 이후 아카키예비치는 별다른 원인 없이 골골 앓기 시작했고 며칠 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소설 속에서 의사도 모른다는 아카키예비치가 앓고 있던 병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생각컨대 외투를 빼앗겨버린 충격과 주위 사람들은 물론 경찰로부터 받았던 모멸감으로 인한 홧병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실제로 모멸감에 자살하거나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적잖이 봐왔기 때문에 이런 추론이 충분히 가능하다. 

 

웃픈 이야기 속에 비친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

 

여느 작가라면 여기서 이야기를 끝냈겠지만 고골은 황당한 반전으로 독자들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들어 버린다. 바로 유령 소동이다. 억울하게 죽은 아카키예비치는 유령이 되어 특이하게도 외투만 강탈하는 황당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결국 생전에 무시당했던 고위 간부의 외투를 강탈한 이후에야 유령 소동은 막을 내렸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 웃픈 상황을 통해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제정 러시아 시대의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소설 속 이야기들이 그대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권력과 정치검찰, 보수언론으로부터 온갖 모멸감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을 선택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단순한 비리 조사가 아닌 의도적으로 피의사실을 하나 둘씩 공표했던 정치검찰과 이를 중계방송하듯 보도했던 보수언론, 상황이 이런데도 수수방관했던 권력은 애당초 전 정권을 도덕적으로 함락시키기 위한 표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직 대통령이 받았을 모멸감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또 이번 세월호 참사는 어떤가! 아카키예비치가 외투를 찾아달라며 찾아갔던 제정 러시아 경찰과 뭐가 다른가 말이다. 침몰 이후 7시간 동안 대통령은 어디에서 무얼 했는지 늑장 대응으로 참사를 키웠고 출동한 경찰은 고위 관료들에 대한 의전은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면서 침몰해 가는 세월호에서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구조하지 못했다. 인재이자 관재였지만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진실 규명 요구에도 법과 원칙만 내세울 뿐 하루빨리 세월호 정국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선거 전에는 잔뜩 머리를 조아리더니 선거가 끝나자마자 오히려 세월호 유가족들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게 바로 이 정권의 민낯이다. 세월호 뿐이던가! 정권으로부터 소외된 수많은 사람들이 먼 이국 땅에서 온 교황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이 황당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제정 러시아 시대 일어났다는 한밤중 외투 강탈 유령 소동만 웃픈 게 아니었다. 외지인이 내민 따뜻한 손을 잡고 위로받는 21세기 대한민국 현실보다 더 웃픈 상황은 없을 것이다.

 

<죄와 벌>, <카리마조프의 형제들>로 유명한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고골의 <외투>를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태어났다."

문학이 본격적으로 소외받는 소시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정서에 기꺼이 동참하는 작가 정신이 비로소 태동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작 작가 정신이 필요한 곳은 권력이다. 낮은 데로 임하는 모습을 직접 실천하며 위로와 감동을 주었던 교황의 부재. 이 공허함과 허전함을 채워줄, 어느 것 하나 잘난 데 없는 소시민 아카키예비치의 소외된 삶에 기꺼이 관심을 가져준 작가 정신을 발휘해야 할 정치는 오늘도 권력 놀음에만 빠져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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