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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닭을 슬프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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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돈/플라톤(BC427~BC347) 지음/최현 옮김/범우사 펴냄

 

우리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눈물을 삼켰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리저리거닐다가 한참 후에 다리가 무겁다고 하면서 반듯이 누웠습니다. 그분에게 약을 내민 사람이 그렇게 일렀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자리에 눕자 사나이는 종종 소크라테스의 손과 발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발을 꾹 누르면서 감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감각이 없다고 대답하자 다리를 눌러 보면서 우리에게 몸이 식어가고 굳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서 다시 말하였습니다.

독이 심장에까지 퍼지면 마지막이 됩니다.”

하반신이 거의 다 식었을 때에 그는 얼굴을 가렸던 것을 제치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것이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내가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갚아 주게.”

그렇게 하겠네. 그 밖의 할 말은 없는가?”
크리톤의 이 물음에는 아무 대답도 없고 잠시 후 몸이 약간 움직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나이가 소크라테스의 얼굴을 가렸던 천을 벗겼습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빛을 잃고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크리톤이 그의 눈을 감겨 주었습니다. -<파이돈> 중에서-

 


 

 

죽음 앞에서 이렇게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소크라테스도 인간이었거늘 누군들 죽음 앞에서 의연하지 못할까 싶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절대 그렇지 못할 것 같다. ‘파이돈은 그리스의 철학자였다. 에리스 출생으로 포로가 되어 아테네로 팔려 갔지만 소크라테스를 만난 덕에 노예에서 해방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플라톤의 『대화편』중 <파이돈>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파이돈>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이유로 소위 불경죄로 기소된 뒤 사형을 선고 받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플라톤은 <파이돈>을 통해 철학의 본질적인 물음에 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의미를 통해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철학과 철학자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즉 철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힘쓰는 것은 죽는 것과 죽음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들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지혜의 획득(philosophia, 철학)이고 이것은 영혼이 신체에서 해방되어 순수하게 되면서 사유의 활동이 가장 잘 발휘되기 때문이다. 타의든 자의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으로 몸소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가르침은 최후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내가 닭 한 마리를 빚졌네에서 더욱 명쾌해 진다. <파이돈>의 주제를 관통하는 명언이 아닐까 싶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의술의 신으로 통한다. 인간이 그를 통해 불사의 능력을 얻을까 두려워해서 번개로 그를 죽일 만큼 의술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아들의 죽음을 슬퍼했던 아폴론은 제우스에게 부탁해 죽은 아스클레피오스를 오피우커스(Ophiuchus, 뱀주인자리)라는 별이 되게 했다고 한다. 이후로 뱀은 아스클레피오스를 상징하는 동물이 되어 신성시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병이 나으면 감사의 뜻으로 닭을 신에게 바치는 것도 바로 뱀의 제물로 쓰기 위함이었다. 요즘도 의료나 의술의 상징으로 뱀이 그려진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신화 때문이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이 마지막 유언은 죽음으로 모든 병이 나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죽음이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이 아니라 철학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엉뚱하게도 조류인플루엔자(AI) 여파로 토종닭을 출하하지 못한 농민이 닭을 농장 밖으로 풀어놓는 일이 벌어졌다는 오늘 아침 조간신문 기사가 <파이돈> 속에 등장하는 이 유명한 문장과 오버랩 됐다면 지나친 감성의 남용일까? 고대 그리스 시대에 닭이 신성한 제물이었다면 그에 못지않게 닭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면서도 가장 유용한 동물이 아닐까 싶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목청이 찢어져라 새벽을 깨워줬고 농작물 틈새를 헤집고 다니면서 해로운 벌레들을 모조리 박멸해 줬다. 뿐만 아니라 닭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간에게 유용한 양식을 제공해 준다. 어릴 적 엄마를 그렇게 졸라 먹고야 말았던 짜장면이나 피자도 나이가 들면 시들해지는 식욕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닭은 요리 방법에 따라 아이 입맛에서부터 어른 입맛까지 두루두루 맞춰주니 보양식의 대명사 닭요리는  그야말로 국민 음식이 아닐 수 없다. 닭의 종족번식 수단인 달걀은 또 어떻고. 김씨 시조 김알지도 닭이 우는 숲 속에서 태어났다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인간은 이런 닭을 슬프게 하는 못된 동물이기도 하다.

 

잊을 만 하면 몇 년마다 한번씩 찾아오는 조류독감. 사람 입맛처럼 간사한 게 있을까. 사람에게 감염되지 않는다고도 하고 혹 감염된다 하더라도 닭으로 하는 요리들이 대부분 높은 온도로 끓이거나 튀기기 때문에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갈 곳 잃은 닭들은 살처분되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오죽했으면 애지중지 키우던 닭들을 방사할 생각까지 했을까. 어디 이뿐인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던 어느 전직 대통령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싸웠던 부정한 권력의 졸개가 되고 말았다. 어릴 적 책상 머리에 붙여놓았다던 미래의 대통령이란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외세의 침입은 인간만이 겪는 고통이 아닐 것이다. 닭과 일본말인 도리’(とり, )를 섞어 국적불명의 이름을 수 십 년간 써왔으니 닭이 말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옛기, 이놈들!’ 했을 것이다. 또 주인이 모이를 주면 주는 대로 다 먹어 배가 터졌다는 허무맹랑한 전설을 만들어 모자라고 우둔한 사람을 닭 대가리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한다. 봄볕이 좋아 담장 아래서 일광욕을 즐기는 닭에게도 인간은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화투 똥광속의 동물이 닭인 줄 알았더니 닭이 아니라 봉황이라니 나서 죽을 때까지 온전히 인간을 위해서만 살다 갈 닭에 대한 예의치고는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싶다. 호랑이가 죽어 남긴 가죽이 부러웠던지 인간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설레발치지만 그 중에 오물 한 점 없는 이름이 몇이나 되겠느냐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완성을 기뻐하며 신에게 닭을 바쳤다지만 평생을 으르렁대며 싸우다 생을 마칠 인간은 지구상에 생겨난 생명 중에 아무 쓸 짝에도 없는 유일한 동물이 아닐까 자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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