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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구뜰한 맛, 이곳이 진짜 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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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표현하는 우리말 

 

▲ 변변하지 않은 국이나 찌개의 맛이 구수할 때 '구뜰하다'라고 한다. 사진>서울신문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 중에서-

 

불온한 상상은 하지 마시라! 결정적인 장면에서 스크린을 온통 달빛 가득한 밤 하늘로 채우는 19금 영화가 아니니까.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의 마지막 장면은 열일곱 살 시골 소년과 소녀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애정행각(?)으로 그간의 갈등이 해소된다. 그 장소는 다름아닌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동백나무(생강나무의 강원도 방언) 아래다. 두 근 반 세 근 반이었을 소년의 마음이 동백꽃의 알싸한 냄새에 그만 정신마저 아찔해졌다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도대체 동백꽃의 알싸한 냄새가 어떻길래 순박한 시골 소년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을까? <동백꽃>을 읽어본 독자라면 알싸한 냄새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을 품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알싸하다맵거나 독해서 콧속이나 혀끝이 아리고 쏘는 느낌을 말한다. 미각이나 후각을 표현할 때 두루 쓰는 우리말이다. 동백꽃의 알싸한 냄새에 소녀의 향긋한 냄새까지 더해졌으니 이 순박한 시골 소년이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나 있었겠는가! 부족하지도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은 김유정식 해학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알싸하다'라는 뜻을 알고서야 비로소 첫사랑이 소년의 심장을 얼마나 콩닥콩닥 뛰게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알싸하다'처럼 맛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잡해지는 세상에 대한 반작용인지 맛을 표현하는 말들은 점점 단순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맛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다 보니 문득 지금 살고 있는 대전에 처음 내려왔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 무르익어가던 2002년 5월, 생면부지 대전에 내려왔을 때 함께 사업을 구상했던 대전 친구들이 가장 먼저 데려간 곳은 대전에서 유명하다는 맛집이었다. 거의 한 달을 맛집 탐방하면서 대전 지리를 익혔으니 구석구석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딱히 '이 집이다' 싶은 곳이 없었다. 디테일한 맛까지 구분할 정도로 미각이 발달하지도 않았거니와 뭐든 맛있게 잘 먹는 내 식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나친 기대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드디어 나만의 맛집을 찾았다. 혼자 식사 준비하기도 귀찮고 배달음식도 썩 내키지 않은 터에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허름한 식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식당이 밀집된 곳도 아니고 주택가 한 가운데 있어 식당 안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메뉴는 3,000원짜리 콩나물밥. 반찬도 김치에 계란 후라이, 콩자반이 전부. 그러나 그 맛은 지금껏 먹어봤던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소박한 차림이지만 정갈하고 맛이 구수하여 먹을 만 할 때 어떤 말을 쓰면 좋을까? 구뜰하다. '구뜰하다'는 '변변하지 않은 음식이 맛은 구수하여 먹을 만 하다'라는 뜻이다. 방송이나 인터넷에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맛집으로 인해 우리네 입맛도 이미 기성화된 요즘 진짜 맛집이란 바로 이런 구뜰한 맛이 있는 식당이 아닐까.

 

맛을 표현하는 우리말에는 '구뜰하다' 말고도 정겨운 표현들이 꽤 많다. 생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맛이 최고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 '모름하다'라는 표현을 쓴다. 국물이 있는 음식에는 '바따라지다'와 '바특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찌개처럼 국물이 조금 적어 묽지 아니할 때 '바특하다'라는 표현을 쓴다. 또 음식의 국물이 바특하고 맛이 있을 때 '바따라지다'라고 표현하면 된다. 매운 음식을 먹을 때는 '매음하다'와 '얼근덜근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되는데 '매음하다'는 혀가 알알할 정도로 매울 때, '얼근덜근하다'는 맛이 맵우면서 달 때 쓰는 말이다. 음식이 아무 맛도 없을 때 쓰는 '짐짐하다'라는 말도 있다. 

 

이밖에도 혀로 느낄 수 있는 오감을 표현하는 우리말 중에는 재미있고 정겨운 표현들이 많은데 그 중 몇 개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달콤새콤하다, 달짝지근하다, 달달하다 등은 단맛을 표현하는 흔히 쓰는 말일 것이다. 단맛을 표현하는 우리말 중에 '달보드레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약간 달콤할 때 쓰는 표현으로 뜻은 비슷하지만 '달달하다'보다 훨씬 정겹게 느껴지진다. 매운 맛을 표현할 때는 <동백꽃>에 나오는 '알싸하다' 말고도 '칼칼하다(맵게 자극하는 맛이 있다)', '얼큰하다(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맵다)' 등이 있다. 분석이나 비평이 매섭고 날카로울 때 쓰는 '신랄하다'도 매운 맛을 표현할 때 쓰는 한자어인데 맛이 몹시 아리고 매울 때 이렇게 표현한다. 맛이 몹시 맵거나 독해 혀 끝이 아릴 때는 '알알하다'라고 표현하면 된다.

 

짭짤하다, 짭조름하다 등으로 대표되는 짠 맛을 표현하는 말 등은 짠 맛이 있으면서 감칠 맛이 느껴질 때 사용하지만 감칠 맛이 없이 조금 짤 때는 '찝찔하다', '건건하다' 등의 표현을 쓰면 된다. 또 짜기만 하고 아무 맛이 없을 때는 '짐짐하다'라는 말을 쓴다. 신 맛을 나타내는 말 중에 재미있는 표현으로는 '새척지근하다', '시척지근하다', '시지근하다' 등이 있는데 모두 음식이 조금 상해서 냄새가 조금 시큼할 때 쓰는 말이다. 쓴 맛에는 '쌉쌀하다', 씁쓰레하다', 씁쓸하다' 등이 있는데 단 맛이 있으면서 쓴 맛이 날 때는 '달곰쌉쌀하다', '달곰씁쓸하다' 등으로 표현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쪽의 한심한 시선을 받자마자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이쪽 쳐다보지 말아요."라고 핀잔까지 먹였다. 그 앙그러진 자태가 살천스런 내숭 같지는 않았으나, 지아비 보기가 점직해서라기보다 아직도 불그죽죽한 제 얼굴에 대한 수치감만은 역연했다. -김원우의 소설 <무병신음기> 중에서-

 

'앙그러지다'는 모여 있는 모양이 잘 어울려 보기 좋다는 뜻으로 음식이 보기에 먹음직한 데가 있을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맛을 표현하는 말은 아니지만 음식과 관련된 재미있는 우리말 중에 '앙구다'라는 말이 있다. '앙구다'는 밥통이나 전자 레인지가 없던 시절 밥이나 음식 따위가 식지 않게 불 위에 올려놓거나 따뜻한 데(온돌방의 아랫목 등)에 묻어두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독서는 다만 지식의 재료를 공급할 뿐이며,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사색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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