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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망실(亡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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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실(亡失)/문태준/2013년

 

무덤 위에 풀이 돋으니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 같아요 오늘은 무덤가에 제비꽃이 피었어요 나뭇가지에서는 산새 소리가 서쪽 하늘로 휘우듬하게 휘어져나가요 양지의 이마가 더욱 빛나요 내게 당신은 점점 건조해져요 무덤 위에 풀이 해마다 새로이 돋고 나는 무덤 위에 돋은 당신의 구체적인 몸을 한 바구니 담아가니 이제 이 무덤에는 아마도 당신이 없을 거예요

 

*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등이 있음.

 

 


 

송골매의 9집 앨범 중에 '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이란 노래가 있다. 갓 스무살로 접어들 즈음 아직 미치도록 사랑해도 모자랄 그 나이에 왜 이 노래를 흥얼거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냥 이별도 아니고 떠난 자와 남은 자 사이에는 카론이 지키는 아케론(죽음의 강)이 놓여있는데 말이다. 읊조리 듯 부르는 배철수의 처연한 목소리가 주는 마력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레테의 강(망각의 강)을 건너서도 변치않을 사랑에 대한 로망이 가슴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나 G 로세티의 시에 배철수가 곡을 붙인 '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은 떠난 자 아니 떠날지도 모르는 자가 남은 자에게 보내는 간곡함이 배어있다.

 

 

▲레테의 

 

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슬픈 노랜 날 위해 부르지 마세요/무덤가에 장미꽃도 심지 마시고/아무것도 심지 마세요/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슬픈 음악 날 위해 만들지 마세요/무덤가에 백합꽃도 심지 마시고/아무것도 심지 마세요/푸른 잡초가 무덤 위에서/이슬에 젖을지라도/그대 기억 나시면 잊어요/아무말 말고 잊어요 잊어요/잊어요/그 희미한 어둠 속에서/그대가 돌아서 가도/난 아무말 없이 웃어요/아무말 없이 웃어요 웃어요 웃어요

 

망실(亡失)은 '기억에서 지우다'라는 뜻이다. '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과 반대로 문태준 시인의 시 '망실'은 남은 자가 떠난 자에게 보내는 애절함을 노래한다. 둘 다 '기억에서 지우겠다'는 다짐이지만 결코 잊을 수 없음에 대한 역설이기도 하다. 불완전한 기억에 담아두느니 내 육체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내 안에서 영원히 나와 함께 호흡하게 되는 것이다.

 

무덤 위에 풀이 해마다 새로이 돋고 나는 무덤 위에 돋은 당신의 구체적인 몸을 한 바구니 담아가니 이제 이 무덤에는 아마도 당신이 없을 거예요 -'망실' 중에서-

 

비로소 레테의 강은 망각의 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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