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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목가시인과 연탄시인, 그들의 이유있는 절필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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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를 끼고 돌면/고요한 호수에 흰물새 날고/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아무도 살지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중에서-

 

정형화되고 상투적인 행동이나 말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교과서적이다'라고 말한다. 명문대에 수석 합격한 학생이 방송에 출연해 수석 합격 비법을 묻는 질문에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라고 하는 말은 사교육 과열을 막기 위한 미디어의 계도적인 의도가 깔린 인터뷰이기도 하지만 많은 수험생들에게는 허탈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교과서란 본디 창의적인 사고를 위한 길잡이가 되어야 하지만 예상 답안을 줄줄 암기해야만 하는 입시 위주의 교육정책 하에서는 스폰지와 같아야 할 청소년들의 뇌를 되려 딱딱한 화석이 되게 한다. 안타깝게도 교과서 하나에 연상되는 이미지들이 온통 부정적인 것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가 주는 선물이 하나 있다면 평생을 두고 시 한 편 외우고 살기 힘들만큼 팍팍한 삶이지만 그나마 있다면 학창 시절 교과서로 배웠던 유명 시인들의 시일 것이다.

 

그런 시 중 하나로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꼽는 독자들도 꽤 있을 것이다. 목가시인이라는 별명답게 읽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전원생활의 풍경이 머리 속에 절로 그려지는 시다. 말이 좋아 목가시인이지 그가 활동했던 젊은 시절이 일제 강점기였다면 목가시인이라는 별명은 현실참여에 소극적이었다는 또 다른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석정이 저항시인이었다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목가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의 시 중에는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한다며 아직 촛불을 켜지 말아달라고 어머니에게 간곡히 당부하는 시도 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신석정 시인의 삶 중에는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을 거부해 해방을 맞을 때까지 절필을 선언했던 적도 있다. 특히 그는 해방 후에도 5.16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시를 발표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를 목가시인이라는 범주에 고립시킨 이유도 이런 그의 삶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거니와 목가시인 신석정은 일본 제국주의와 군사정권에 항거한 저항시인이었다. 

 

 

 

목가시인이라는 신석정의 별명만큼이나 각인된 그것을 가진 시인이 또 있다. 바로 연탄시인 안도현이다. 사실 필자는 안도현을 연탄시인으로 등극케 한 시 '너에게 묻는다'를 전부 읽어보지는 못했다. 아니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구절이 '너에게 묻는다'의 전체인지, 일부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짧은 구절에 감동받아 읽어본 그의 시 중에는 연탄을 소재로 한 시가 또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중에서-

 

연탄시인 안도현 시인이 절필을 선언했다. 정확히 말하면 시한부 절필선언이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문인 200여 명이 안도현 시인의 절필선언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소설가 박범신,공선옥, 시인 도종환, 정호승 등 217명의 문인들은 '절필이 강요되는 시대, 우리는 함께 싸운다'는 제목의 성명에서 "안도현 시인의 결단은 단지 한 시인의 절필 사건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펜을 놓는 선언적 행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심각한 이상 징후를 경고했다"며 "국가권력의 횡포로 우리 대한민국의 문인들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이 침체되거나 위기를 맞게 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안도현이 되는 걸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안도현 시인은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안중근 의사 유묵을 훔쳐 소장하고 있거나 유묵 도난에 관여돼 있다'는 내용의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상태다. 안도현 시인의 이번 절필선언이 마뜩찮은 것도 사실이다. 그는 지난 대선 당시 작가이기 전에 야당 대선후보 진영의 정치인이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도 이런 그의 정치적인 행위의 결과물이거늘 작가적 생명과 연결시키는 것은 좀 오버하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않은 수의 문인들이 안도현 시인의 절필선언을 지지하고 나선 데는 엄중한 시대적, 작가적 책임과 의무 때문일 것이다. 또 현 시국이 국가권력에 의해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당할 위기에 처해있다는 절박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지지선언으로 봐야 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소설 <25시>의 저자 콘스탄트 비루질 게오르규는 작가를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했다. 초기 잠수함에는 산소의 양을 측정하는 기계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토끼를 태우고 다녔는데 토끼는 산소 부족에 예민해 먼저 죽는다는 것은 잠수함 승무원들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작가는 남다른 감수성을 가진 존재로 위기의 징후를 가장 먼저 포착하고 위기에 대한 경고 메세지를 사회에 보낸다는 것이다. 이번 안도현 절필선언에 지지한 문인들은 현 시국을 위기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중립을 지켜야 할 정부기관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도 집권자인 대통령은 가타부타 언급을 피한 채 침묵만 지키고 있고 진실을 밝히려는 다양한 시도들은 다양한 형태의 방해공작에 지지부진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도현 시인의 절필 선언과 이를 지지한 문인들은 이런 위기상황을 감지하고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위기상황을 고발하고 대처하는 작가적 양심은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1894년 프랑스의 군인 드레퓌스는 독일 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돼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독일대사관에서 빼내온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빼고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지만 군법회의는 그에게 지나친 가혹한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이후 진범이 따로 있다는 물증을 확보했지만 프랑스 군부는 이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이 부당한 사건의 진실 규명에 나선 이가 바로 <목로주점>의 작가 에밀 졸라였다. 에밀 졸라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형식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논설을 써 군부의 부당한 결정을 비판하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200여 명의 문인들은 안도현 시인의 절필선언이 정치적이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이상 징후에 대해 안도현 시인이 먼저 감지하고 선언적 행동을 통해 경고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제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장외투쟁을 선언했다고 한다.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을 규명하기 위한 국정조사에 임하는 새누리당의 국조 회피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벌써부터 언론은 국정조사가 지지부진한 원인에 대한 분석은 없이 또 다시 정쟁 국회를 부각시키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국민들의 귀와 눈이 사라진 지는 오래다. 안도현 시인의 절필선언과 이를 지지한 수많은 문인들의 우려대로 지금 한국 사회는 분명 위기 상황이다. 수십년 간 민중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민주주의란 공든 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진실을 말해야 할 언론은 죽었다. 국민들 스스로 진실을 규명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탑을 다시 쌓아올려야 한다. 그래서 잠수함 속의 토끼는 산소가 희박해지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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