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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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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건너는 법/서영은/1975년

 

작열하는 태양이 그나마 남은 습기마저 온전히 빨아들이는 곳, 생명이란 태초의 기억 속에 갇혀버린 곳, 땅으로부터 상승하는 열기에 삶의 이유마저 흔들리는 곳, 신화 속 이야기의 재현인 양 살 한 점 붙어있지 않은 백골이 뿌려진 곳. 극한 도전의 단골메뉴이자 마지막 단계인 사막은 그렇게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도전에 쓴 웃음을 연신 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막 맞은 편에 희망이 있다면, 그래서 꼭 건너야만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막 입구에서 그저 주저앉을 것인가, 무색 무취의 화염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아니 삶에 대한 열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당신은 저 절망의 사막을 건너야만 한다. 강요된 선택이건 자발적 선택이건 당신이 해야 할 결정은 한가지다. 이제 남은 것은 저 사막을 어떻게 건너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의 시간 뿐이다. 

 

여기 사막의 입구에서 방황하는 한 남자가 있다. 희망의 끈을 잡아보려 하지만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덫은 오히려 절망스런 순간만을 확대 재생산할 뿐 몸 속 어딘가에 남아있을 열정의 발현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사막을 건너야만 하는 이유조차 상실한 이 남자는 그대로 사막 앞에 주저앉고 말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절망의 늪을 허우적대고 있는 당신에게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서영은의 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의 주인공 '나'의 일상은 권태와 짜증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을 아름답게 그려야 할 미대생에게 권태와 짜증은 이내 절망으로 바뀌고 만다. '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집에서 눈을 뜬 첫날 아침을 나는 이상한 비현실감 속에서 맞았다. "이런 전선에서 두부 장소 종소리,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수돗물이 넘치는 소리가 웬일일까?"라고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던 것이다. '이런 전선에서'란 느낌은 그 순간 어떤 긴박한 위기에 대한 생생한 의지였다. 그것은 아직도 내 몸에 밴 전쟁 냄새였다. -<사막을 건너는 법> 중에서-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이었던 '나'가 전역하고 귀국한 이 땅은 전쟁이라는 긴박한 위기는 커녕 너무도 느긋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 뿐이다. 여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군대라고 했던가! 소위 체력과 정신 단련의 기간이라 여기는 군대와 달리 '나'가 경험한 군대는 바로 옆에서 동료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만 했던 긴박한 위기의 순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 친구인 나미는 "그럼 자긴 베트콩을 한 사람도 못 죽여봤어?"라는 말을 너무도 태연스럽게 한다. '나'가 현실에서 느끼는 괴리감은 권태스럽고 짜증난 일상이 되고 급기야 사막의 한 가운데로 내몰고 만다. '나'에게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받은 을지무공훈장은 '한낱 작은 쇠붙이 조각'에 불과하다.

 

'나'는 영영 사막을 건너지 못할 것인가. 공터에서 뽑기 과자를 팔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나고 '나'는 비로소 한가지 깨닫음을 얻게 된다. 아홉살 난 손녀와 살고 있다는 노인은 아들이 키우던 개를 데리고 날마다 오물로 가득찬 웅덩이에서 뭔가를 찾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아들이 받은 훈장을 이 웅덩이에서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내가 받은 것과 똑같은 을지무공훈장을 웅덩이에 던져놓고 노인이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나'의 이런 행동은 노인에게 희망을 찾아주기 위해서라기보다 '한낱 작은 쇠붙이 조각'에 불과한 훈장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란 것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데다 그것을 말해서 노인이 알아들을지도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보다 차라리 진흙투성이가 된 보잘것없는 훈장을 노인의 코앞에 들이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노인의 각별한 의지가 결국 무지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노인의 눈 속에서 희망도, 의지도, 믿음도 다 사라지고, 대신 사막처럼 막막하고 끝없는 허무의 모습이 비치는 광경을 보아야 나는 비로소 이전의 생활로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막을 건너는 법> 중에서-

 

그러나 기막힌 반전이 일어나고 만다. '나'는 노인에게 어렵게 찾은 척 웅덩이에서 훈장을 건져 노인에게 건넸지만 노인은 노여움과 차가운 경멸의 한 마디를 던진다. 

 

"바보 같으니라구!"

 

사실 노인의 말은 죄다 거짓말이었다. 아홉살 난 손녀는 이미 교통사고로 죽었고, 아들이 키우던 개는 병들어 버려진 것을 주워온 것이었다. 심지어 아들이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받은 '을지무공훈장'은 노인이 웅덩이에 버린 것이었다.

 

노인은 '나'가 느끼던 권태와 짜증과 정말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아니 '나'보다 훨씬 더 무겁고 냉혹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의 이런 괴상한 행동은 극한의 절망에 빠진 노인이 나름대로 고안해 낸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어딘가에서 또 이런 괴상한 행동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나'는 정말 바보였었다. 

 

'사회'라는 덫에 갇혀 사는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 절망스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절망을 극복하는 데는 개인과 사회의 공동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수없이 봐왔지 않았는가! 사회가 만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었던 적이 결코 없었다는 것을. 사회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가시적이고 추한 얼굴이 향한 곳은 결국 권력과 자본의 악취가 진동하는 소수의 공간이다. 인간이 평생 살아야 할 공간인 사회가 '덫'일지도 모르는 이유다. 오히려 개인이 기댈 수 있는 곳은 개인과 개인이 모여 살을 부대끼는 작은 공동체가 아닐까싶다.

 

조금은 실망스러울 것이다.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이라 해놓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각자가 처해있는 절망과 또 맞닥뜨리게 될 절망의 원인과 현실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나름의 고민과 선택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괴상하게 보이지만 노인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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