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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왜 불륜과 비극의 장소로 물레방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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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나도향/1925년

 

바야흐로 프로야구의 계절이다. 올해는 창원을 연고로 한 제9구단 NC 다이노스까지 합세해 꿈의 양대 리그가 현실화되고 있으니 야구팬들에게는 희망 부푼 한 시즌이 될 것이다. 필자도 이런 부류 중 한명이다. 1982년 여섯 개 구단으로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도 이제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만큼이나 야구장을 찾는 관중들의 응원문화도 한층 성숙해졌다. 남성 일색이던 초창기와 달리 지금은 야구장을 찾는 여성들의 수도 만만찮게 늘어나고 있다. 야구장 여기저기서 벌어지던 추태는 거의 자취를 감췄고 직장인들은 회식장소로 야구장을 이용하기도 한다. 각자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희비가 엇갈릴 때마다 애교섞인 다툼을 하는 어느 커플은 모 야구장의 명물이 되었다.

 

한때 야구가 지역대립의 시연장이던 시절도 있었다.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은 부산 사직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은 광주 구장에서 상대 구단 팬들로부터 이유없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정치인들이 만들어놓은 지역감정의 골은 프로야구를 통해 더 깊어지는 양상이었다. 게다가 권력의 하수인 노릇에 불과했던 미디어의 특정 지역에 대한 폄하와 미화에 중독된 팬들은 즐기는 스포츠가 아닌 상대 지역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고 반감을 표현하는 장소로 야구장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정치인과 몰지각한 언론에 의해 형성된 특정 지역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로소 관중들이 즐기는 스포츠로써 야구장을 찾고 있으니 세월이 감개무량할 뿐이다.

 

 

선입견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의나 주장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마음 속에 굳어진 견해'를 말한다. 뜻풀이 그대로 선입견의 가장 큰 문제는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은 제 삼자를 통해 들은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또는 맹신하거나 권력이나 미디어에 의해 세뇌당한 결과에서 비롯된다. 사회적 문제가 되는 많은 선입견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조작되고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침묵했던 과거 독일이 그랬고 요즘 우리 사회의 종북 논란도 실체없이 조장된 이미지에 의해서 대중심리가 발동되는 것이다. 중국이나 동남아 노동자, 흑인에 대한 선입견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영화 <뽕>에 출연했던 배우가 영화 <뽕>이 예능이나 개그 프로에서 희화화되는 것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내비친 적이 있다. 원작도 영화도 예술적으로 높이 평가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에로티시즘만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삼류소설쯤으로 폄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반 대중도 선정적인 영화의 대명사쯤으로 치부하고 만다. 이런 선입견은 배우의 연기 생명과 연결되기도 한다. 영화 <물레방아>에 출연했던 남녀 주인공은 에로 배우라는 선입견 속에 연기의 폭을 확대하지 못한 채 스크린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영화 <뽕>이나 <물레방아>의 원작이나 영화를 직접 읽고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두 영화는 조작된 이미지에 의해 영화로서의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의 원작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작가 나도향의 작품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도 미디어에 의해 조장된 선입견에서 그렇게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작가가 굳이 소설 속에 에로티시즘을 넣어야만 했던 당위성은 따져보지도 않은 채. 물론 소설이 독자들에게 에로티시즘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나도향의 소설 <물레방아>는 후기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의 또 다른 소설인 <벙어리 삼룡이>와 <뽕>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적 갈등이 남녀의 애정문제와 결부되어 드러난다. 그렇다고 <물레방아>를 경향문학의 범주에 넣지 못하는 것은 저자의 계급의식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못한 채 불륜과 비극이라는 결말에 이르고 마는 한계 때문이다. 물론 계급의식이 구체화되지는 못하지만 서로 다른 계급의 등장인물간 갈등이 가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물레방아에서 들여다보면 동북간으로 큼직한 마을이 있으니 이 마을에 가장 부자요, 가장 세력이 있는 사람으로 이름을 신치규라고 부른다. 이방원이라는 사람은 그 집의 막실살이를 하여 가며 그의 땅을 경작하여 자기 아내와 두 사람이 그날그날을 지내 간다. -<물레방아> 중에서-

 

소설은 신치규와 이방원의 아내 사이에 벌어지는 불륜 행각과 이를 알아챈 이방원이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 자살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분명 소설은 지배 계급의 피지배 계급에 대한 부당한 권력 행사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고 발전하지만 계급 문제에 대한 심도있는 고민 대신 애정문제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경향문학로 발전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다. 즉 신치규와 아내 사이의 불륜 행각을 아내에 대한 보복으로 해결하고 만다는 것이다.

 

눈깔을 부라리었다. 방원은 한참이나 쳐다보고서 말이 없었다. 생각대로 하면 한 주먹에 때려 누일 것이지마는 그래도 그의 머리 속에는 아까까지의 상전이라는 관념이 남아 있었다. 번갯불같이 그 관념이 그의 입과 팔을 얽어놓았다.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남을 섬겨 보기만 한 그의 마음은 상전이라면 모두 두려워하는 성질을 깊이깊이 뿌리박아 놓았다. -<물레방아> 중에서-

 

군데군데 저자의 문제의식이 드러나긴 하지만 소설 전체에서 풍기는 에로티시즘은 독자와 계급의식에 대한 공감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적인 글쓰기임에 틀림없다. 나도향의 많은 소설들이 영화화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결국 소설 <물레방아>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비극적 결말이라는 다소 평범한 주제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고 에로티시즘을 핑계로 소설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에로티시즘이라는 소설적 장치는 이 소설이 가지는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적 특징을 부각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하필 불륜과 비극의 장소로 물레방아를 선택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한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도향의 소설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문학 작품이나 가요 등에서 물레방앗간이나 뽕밭은 은밀한 연애의 장소로 풋풋한 사랑의 추억이 녹아있는 장소로 표현되기도 한다. 나도향의 소설이 나오기 전이든 후이든 관계없이. 무엇보다도 가장 서민적 장소로써의 물레방아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관통하는 최적의 조건일 수밖에 없다. 지금이야 사라지고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고 시장처럼 많은 말들이 만들어지는 곳이 물레방아였다. 소문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다양한 소재는 물론 체계화, 조직화되지는 못하지만 의식이 싹틀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장소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물레방아가 가지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이라는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물레방아는 어떤 동력 장치 없이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게 하는 구조물이다. 이곳에서의 비극은 자연의 순리를 거부한 인간의 탐욕에 대한 응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물레방아가 가지는 생산이라는 성질은 자연스럽게 남녀간의 애정문제나 에로티시즘을 연상하게 만든다. 가장 서민적인 장소에도 불구하고 일년 중 특정 기간에만 이용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폐쇄성과 은밀성도 남녀간의 애정문제와 어렵잖게 결부시킬 수 있는 요소는 아닐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물레방아>나 <뽕>에 대한 미디어의 부정적이고 희화된 노출은 조장된 선입견이 얼마나 독자와 관객의 뇌리에 뿌리깊게 박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관계 기관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무분별한 가위질은 특정 예술작품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평가는 그것을 향유하는 소비자의 몫이다. 또 예술과 외설의 경계도 독자와 관객이 치열한 토론과 논쟁으로 결정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관계 기관이 예술 작품에 대해 애매모호한 기준으로 칼질을 해대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고 독자와 관객의 예술에 대한 수준 저하를 초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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