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북 리뷰

트로이의 여인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천번째 수요집회

반응형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BC 415년 초연

오늘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1,000번째 수요집회가 있는 날이다. 1992년 1월8일 수요일에 시작되어 매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겨우 63명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맺힌 절규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게다가 정치적 논쟁거리로 전락하고 만 친일파 청산은 해방이 되고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오히려 현정부 들어 일제 강점기를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심심찮게 들리고 있으니 이런 상황을 지켜봐야만 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피를 토하는 심정일 것이다.

전진할 것만 같던 역사의 수레바퀴가 후진기어를 넣고 내달릴 수도 있다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 지금 열이 펄펄 피어올라 숨쉬기조차 힘들고 때로는 얼음장같이 차가워 심장마저 멎을 듯한 아스팔트 위에서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유언처럼 세상을 향해 힘겹게 절규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국제사회에 환기시키는 적지않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한편 일본의 사죄를 목적으로 시작한 수요집회가 최근에는 전쟁과 여성인권이라는 평화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또 12월 중에는 2004년부터 기금 마련을 시작해서 서울 마포구 상산동 성미산 자락에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 문을 연다고 하니 전후세대와 미래세대에 전쟁의 참혹성과 전쟁이 빚어낸 반인권의 참상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교육현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비극이다. 전쟁이란 단어 자체가 비극일 수밖에 없다. 에우리피데스(BC484?~BC406?)의 비극 <트로이의 여인들>을 읽으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오버랩되는 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 뿐만 아니라 인간성까지 파괴해 버리는 잔인한 전쟁이 결코 먼 옛날 어느 위대한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이들이 여전히 살아있고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또다시 반복된다는 역사의 진리를 믿어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트로이 목마'로 더 유명한 트로이 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지고 간 황금사과를 차지하기 위한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벌였던 그리스 미인 선발대회(?)에서 심판관 자격으로 참여하게 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고 차지한 그리스 장군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다고 한다. 물론 신화적 상상이다. 결국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한 트로이. <트로이의 여인들>은 트로이 전쟁 전후 처리과정에서 트로이의 여인들이 전리품으로 그리스에 팔려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과 아동의 인권이 유린되는 과정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위안부 할머니들의 심정이 이러지 않았을까.

포세이돈의 트로이 전쟁 경과 설명으로 시작된 <트로이의 여인들>은 망국의 한을 뒤로 한 채 트로이 여인들이 즉 왕비인 헤카베는 오디세우스의 종으로, 공주인 크산드라는 아가멤논 왕의 아내로, 또 한명의 공주인 포리크세네는 아킬레우스 묘에 시중을 드는 하녀로, 헥토르의 아내였던 안드로마케는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의 아내로 팔려가게 된다. 결코 남 일같지 않은 망국의 설움. 거기에 수반되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의 가장 참혹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된다.

헤카베 … 아! 나라를 잃고 남편과 어린 것들을 잃은 가엾은 내가 비탄에 젖은들 무엇하랴. 조상들의 영화도 오늘은 사라지고 한낱 서글픈 꿈. 무엇을 이야기하며 무엇에 대해 침묵하고 무엇을 슬퍼해야 할 것인가. 딱딱한 방바닥에 이처럼 쓰러져서 괴로워하는 가엾은 운명이여! 이 머리, 이 관자놀이, 이 옆구리의 아픔이여! 견디다 못해 창자를 비비 꼬고 끝없는 비탄에 젖어든다. 불운한 환자에게 위안은 오직 슬픔의 울부짖음뿐. -<트로이의 여인들> 중에서-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은 결국  크산드라를 광녀로 만들고 포리크세네는 죽은 자를 위한 제물로 희생되고 만다. 전쟁은 이런 것이다. 이런대도 국내 최고대학 교수라는 사람은 '정신대는 자발적 형태의 성매매'라는 망언을 서슴치 않고 있다. 뿐인가! 그들은 만주군 장교로 혈서까지 쓰며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친일파 전직 대통령을 부활시키기 위해 중고등학교 교과서까지 수정하는 대담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전쟁의 잔혹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쟁은 모성애로도 극복할 수 없는 심각한 아동 인권 유린을 자행한다. 오디세우스의 제안으로 안드로마케의 아들 아스티아낙스의 삶에 대한 절규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만다.

안드로마케 … 아, 부드러운 살결, 향기로운 냄새, 언제까지나 이렇게 안고 있었으면! 포대기에 싸서 젖먹여 기르고 모성의 불안과 괴로움으로 정성을 들였건만 모두가 헛되도다! 자. 마지막으로 힘껏 껴안고 입 맞춰다오. … -<트로이의 여인들> 중에서-

1959년 UN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아동인권선언'에는 '아동은 전쟁이나 재난으로부터 제일 먼저 보호받고 구제받을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그리 관대한가! 전쟁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온갖 추악한 단어들을 총동원해도 모자라는 거대한 괴물인 것을.

한편 <트로이의 여인들> 중간에 삽입된 헤카베와 헬레네의 트로이 전쟁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은 그리스 신화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꽤 흥미진진한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중에서도 가장 처절한 비극으로 평가받는 <트로이의 여인들>을 소개하고 있는 오늘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1,000번째 수요집회라니 그 어느 때보다 착잡한 심정이다. 우연의 일치가 착잡한 게 아니라 할머니들이 20년 동안 거리로 나선 이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를 생각하면 그렇다. 일본의 사죄는 뒤로 하고라도 우리는 일본의 사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제국주의 일본을 옹호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이 반역의 시대에 말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노란 스카프를 그야말로 희망의 빛깔로 바꾸기 위해서 헤쳐나가야 할 미래가 그리 녹녹치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건 여전히 양심적 다수가 어우러진 우리 사회의 건전성을 믿기 때문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