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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그에게 결혼보다 더 절박했던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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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성의 <하수도 공사>/1932년

 

목포는 항구다. 대중가요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된 목포의 이미지는 항구다. 한편 목포는 예향이다. 목포 앞바다에 그림처럼 자리잡은 삼학도를 바라보고 영산강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따라 일명 '예술의 거리'라는 문화벨트가 형성되어 있다. 각종 박물관과 전시관, 기념관 등이 드넗은 바다를 향해 펼쳐져 있다. 이 건축물 중 목포문학관에는 한국문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4명의 목포 출신 문학인 기념관이 있다. 사실주의 연극을 완성한 차범석, 근대극을 최초로 도입한 김우진, 계간 문학과  지성을 창간한 평론가 김현, 우리나라 여류소설가 최초로 장편소설을 집필한 박화성 아이들과 함께 목포여행 계획이 있다면 '예술의 거리'를 한번쯤 둘러보는 것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될거라 믿는다.

특히 우리나라 문학인 중 최초로 개인 문학관을 가졌던 소설가 박화성에 대해서는 비록 교과서에는 그의 작품이 없었으나 우리지역 출신이라 '박화성'이라는 이름만큼은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런 박화성의 소설을 중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읽게 되었다. 단순히 교과서에 없다는 이유로...나 또한 박제화된 우리교육의 피해자는 아닌가 싶다.

 

1925 <추석전야>로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한 박화성은 1932년 소설 <하수도 공사>가 다시 이광수의 추천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된다. 발표 당시 한설야가 대중의 투쟁을 표현하고 있는 기억할 작품으로 평가했던 <하수도공사>는 박화성이 일제 당시 목포 하수도공사 현장을 직접 취재해서 쓴 소설로 일용직 현장 노동자의 자각 과정을 긴장감 있는 문체로 그리고 있다.

 

프로문학을 심정적으로 지지한 동반작가로서의 면모

 

박화성은 데뷔 초기 동반작가로 활동했다. <하수도 공사>에는 동반작가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동반작가란 카프의 맹원은 아니지만 프로문학을 심정적으로 지지한 이론과 작품을 발표한 작가들을 말한다. <하수도 공사>도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을 그리고 있지만 경향문학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살인이나 방화 등은 피했지만 현실인식이 다소 소극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렇다 보니 자본의 실체를 파헤치는데 다소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다. 한편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다소 싱겁게 끝나버리는 듯 하지만 현실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잔소리 말아라. 우린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의 임금을 찾고저 하는 거다.”

대중을 속이는 것이 불법이지 왜 우리가 불법이냐? 오늘은 세상 없어도 우리의 피땀의 값을 찾고야 말 거다.” -<하수도 공사> 중에서-

 

<하수도 공사>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요즘도 문제가 되고 있는 건설현장의 하청 문제를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본과 권력에 의해 어떻게 노동자 탄압이 이루어지는가를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실업 노동자를 구제할 목적으로 부청(오늘날의 시청)에서는 중정이라는 자에게 78천원의 경비로 하수도공사를 청부한다. 그러나 중정은 공사대금의 4할은 자기 주머니에 채우고 나머지 478백원으로 공사를 강행할 계획을 세운다. 현금이 없던 중정은 산본이라는 자에게 우선 18천원을 얻어서 78백원은 목포 부청에 납입하고 나머지로 3백명의 노동자를 모집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임금이 있을 리 없다. 결국 임금은 체불되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날로 궁핍해져만 간다.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동권에게 결혼보다 더 절박했던 문제는...

 

<하수도 공사>에서 의외로 많이 다루어지는 갈등이 주인공 동권을 둘러싼 가족과 연애 문제다. 소설 전체의 주제의식이 가려질 것 같지만 사실은 한 단계 높은 노동자 연대를 위한 계기로 작용한다. 애인 용희는 계모와의 갈등으로 방황하는 동권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던 동권이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용희 부모가 생각한 정혼자가 따로 있었다는 점과 동권이 일본 유학 시절부터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고 따랐던 정이 격문사건으로 체포된 것이다.

 

동권은 정을 잃어버린 후로는 자기의 온몸을 의지하고 있던 골격이 부서진 듯이 마음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매일의 노동은 무의미한 호구의 수단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하수도 공사> 중에서-

 

동권은 현실적 갈등 앞에서 결혼보다 더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희 곁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동권에게 결혼보다 더 절박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체포된 정의 딸 정혜가 부르고 있는 창가 소리가 그 답을 제시해 준다. 정혜가 부르고 있던 노래는 다름아닌 메이데이의 노래였다. 그렇다면 그는 사상적 신념 때문에 애인을 버렸던 것일까? 작가 박화성은 동권이 용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동권의 사상적 신념과 애인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을 휴머니즘이라는 틀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임을 확인시켜 준다.

 

모든 객관적인 정세가 나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므로 나는 이곳을 떠나고야 만다. 사랑한 사람을 두고 떠나는 나도 종시 사람인지라 어찌 한 줄기의 눈물이 없을까마는 나는 보다 뜻있는 상봉을 위하여 떠나는 것이다. 용희가 참으로 나의 뜻을 알고 나를 사랑한다면 자기 스스로 모든 장애를 돌파하고 자체를 개척하여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여성이라고 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부디부디 굳세게 살아다오. 1931.12.13 떠나는 동권 -<하수도 공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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