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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신라장군 이사부는 독도를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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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의 영토분쟁 관련기사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중국과는 댜오위다오(釣魚島ㆍ일본명 센카쿠열도), 러시아와는 쿠릴열도를 두고 충돌이 격화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일본의 영토분쟁화 의도를 차단하고 있다.

반면 우리 정부는 독도를 영토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공세에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현정부 뿐만 아니라 역대 정부들도 적극적인 대응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은 극우세력들을 중심으로 독도 침탈을 구체화하고 있다.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문서는 1905년 시마네현 고시다. 이는 시기적으로 보아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위한 급조된 문서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이전에도 한국과 일본 어느쪽이 독도를 실효적 지배를 했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록된 지증왕의 우산국 복속(512년) 관련 기록은 우리가 오래 전부터 독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지증왕, 모형사자로 우산국을 복속시키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22대 지증왕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지대로이다. 국사책에서 배웠듯이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도 지증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지증왕이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키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슬라주(지금의 강릉) 동쪽 바다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우릉도(于陵島, 지금의 울릉도)가 있다. 이 섬은 둘레가 2만 6,730보이다. 이 섬 속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을 바쳐오지 않았다. 이에 왕은 이찬 박이종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때 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위협했다. "너희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버리겠다." 이에 오랑캐들은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이에 이종을 상주어 주백을 삼았다.

又阿瑟羅州 東海中便風三日程 有于陵島. 周廻二萬六七十百三十步. 島夷特其水深. 驕傲不臣. 王命伊朴伊宗 將兵討之. 宗作木偶獅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卽放此獸. 島夷畏而降. 賞伊宗爲州伯.

이와 비슷한 기록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우릉도 대신 우산국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산국(于山國)이라 함은 이 우릉도(울릉도)에 있던 소국을 말한다. 우산국은 울릉도를 비롯하여 그 주변 부속섬들을 지배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증왕은 독도를 보았을까?  

일본은 우리의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독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한국이 삼국시대부터 독도를 실효적 지배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울릉도는 울진에서 2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 독도는 울릉도에서 87km 지점에 있다. 맑은 날이면 울릉도에서 독도를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산국은 울릉도 및 그 주변 부속섬들을 지배했던 소국이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 있던 독도도 우산국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점은 충분히 추정가능하다.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무인도이기 때문에 섬이름만 없었을 뿐 당시 어부들의 어업권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육지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울릉도까지 왕래할 수 있는 조선기술이 있었던 당시 지근 거리에 있던 독도를 가보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의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에 관한 기록은 이후에도 많은 역사서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끊임없는 영토분쟁에 중국이나 러시아가 정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학계나 시민단체 및 누리꾼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과거 제국주의에 대한 진정성있는 자기 반성이 없는 상황에서 또다시 침략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는 일본에 대한 또 동북공정이라는 이름하에 영토분쟁을 꾀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정부차원의 확실하고 단호한 대처가 요구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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