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배수아/1994년
"저같이 작은 중소기업 사장 하나도 30개국을 정복할 수 있는데 젊은이들이 왜 정부에게 일자리를 창출하라는 수동적인 입장인지 모르겠다."
새누리당 대선후보인 박근혜의 야심작이었던 김성주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의 말이다. 최근 심각해지고 있는 청년실업에 대해 수동적인 요즘 젊은이들을 질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청년실업과 관련해 '청년들은 개척정신이 필요한데 안 찾는 것이 문제'라는 진단을 내렸다고 한다. 스스로를 '재벌좌파'라고 하더니 정작 그녀의 행보는 '극우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에게는 심한 결핍이 하나 있다. 자신의 성공신화에 도취된 나머지 어떤 문제를 야기시킨 사회 시스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똑같은 시절을 경험했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공'이라는 결과뿐이다.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에게서 독선과 오만의 냄새가 풍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이 1970년대 개발독재 시절도 아닌데 '하면 된다'는 정신력 하나로 청년실업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망상에 젖어있다. 이보다 속편한 정책이 있을까 싶다. 그들은 늘 청춘을 싱그런 푸른색에 비유한다. 꿈과 희망이 충만한 색, 열 번 넘어져도 열한 번째 벌떡 일어설 수 있는 에너지로 가득한 색, 과거를 얘기하고 현재를 투덜대면 왠지 어울리지 않은 색, 방황마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각색될 수 있는 색, 짧은 햇빛만 있어도 활발한 광합성이 가능한 색.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이 대부분인 청춘 카운셀러들이 바라보는 젊음은 그렇게 푸른색이고, 그 색이 가지는 가능성은 수학의 무한대로 표현된다. 오로지 정신력 하나면 안될 게 없는 세대가 바로 기성세대가 바라보는 청춘의 본질일 것이다. 그래서 청년실업의 해법도 단순명쾌하다.
그러나 청춘을 상징하는 푸른색이 흘려보낸 자의 여유로, 성공신화 주인공의 자아도취로 바라보는 그렇게 단순한 의미에 불과한 것일까? 소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의 저자 배수아는 젊음의 상징, 푸른색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청춘은 일탈을 꿈꾸고 수없이 많은 방황의 세월들을 견뎌내며 초록에 붉은 핑크가 섞여 있는 사과가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청춘은 시고 떫은 푸른 사과다. 청춘이 쟁반에 담긴 사과를 짙은 녹색으로 그리는 데는 그 나이 때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이기도 하지만 정형화되고 모순으로 점철된 사회구조가 만들어내는 비루한 현실이기도 하다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여자 의사나 동시통역사, 하다못해 번듯한 오피스 걸조차도 나는 될 자신이 없다. 그런 여자들을 항상 나는 존경하였고 내가 도저히 갈 수 없는 나라에 살듯이 우러러보았다. 아버지나 오빠 같은 남자와 결혼하여서 친정에서 김치를 가져다 먹으며 끊임없이 애를 낳으면서, 시집간 사촌 언니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았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중에서-
소설은 다양한 색을 통해 청춘의 본질을 파헤친다. '열다섯 살처럼 생기발랄하지도 않고 서른다섯 살의 오후처럼 지쳐 있지도 않은' 이십 대의 청춘에게 어느 국도에서 차 앞을 지나쳤던 고양이의 색깔도 검은색으로 보일만큼 우울하고 불안하다. 잠자리에 들 때면 항상 내일은 무엇을 하나 그런 생각으로 가득한 나이가 스물다섯, 청춘이다. 이런 청춘에게 현실은 하얀색을 강요한다. 가장 무난한 색, 개성보다는 정형화된 사회 속의 몰개성을 상징하는 색.
유선이는 남자 손님에게 초록빛 셔츠를 골라주고 있었다. 나는 평범한 것이 좋아요, 하고 그 손님이 대답하였다. 직장에서 입으실 건가요? 이런 연한 핑크는 어때요? 아님 이런 푸른 스트라이프는요. 얼굴이 까맣고 키가 작은 그 남자는 결국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셔츠만 두 벌을 샀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중에서-
드라마 속 뻔한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길 원하는 사회, 아름다운 공주가 왕자와 만나서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만 있는 사회. 청춘은 그렇게 정형화된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엄습해 오는 불안을 방황과 일탈로 현실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젊은 청춘들의 사랑과 좌절과 비극은 강요된 현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포장된 사회를 살아가는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이 시대 청춘들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 속에서 청춘들이 꿈꾸는 미래는 과거의 암울한 기억처럼, 먼지투성이 국도에서 형편없이 시고 떫은 사과를 팔고 있는 여인처럼 불안하고 불길하기만 하다. 주인공 '나'와 디스플레이어의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친구의 비극을 초래했던 은빛으로 반짝이는 헹켈 주방용 가위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새벽이 이제 오려고 하는 마지막 여름의 어둠을 향해서 나는 속삭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섹스의 기쁨도 모르고 사랑의 감동도 없다. 멀리로 나 있는 길을 바라보면서 나는 스산한 먼지바람 속에 서 있다. 초록빛 강물 냄새와 오래된 풀잎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바다로 가는 길이 이쪽인가요, 하고 차를 멈추고 여행자들이 내게 묻는다. 바람이 나의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길가의 키 큰 마른 풀들을 눕게 한다. 그들의 차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음악이 요란하고 그들은 푸른 사과를 산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중에서-
아프니까 청춘인 것도 맞지만 청춘을 아프게 하는 사회와 현실을 냉정하고 돌아보지 않는 카운셀링은 시고 떫은 푸른 사과를 곪아 터지게 할 뿐이다. 청년들이 개척정신이 필요한데 안 찾는 것이 청년실업의 문제라는 속편한 진단은 비루한 현실을 강요당하고 있는 이 시대 청춘들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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