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관 약전(略傳)/성석제/1997년
남산의 못생긴 바위에는 '똥깐이바위'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 아래의 굴에는 '똥깐이굴'이라는 이름이 보태졌고, 그 앞의 비석은 '똥깐이비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훌륭한 깡패가 되려는 소년은 모름지기 그 바위, 그 굴, 그 비석으로 순례를 떠나야 한다는 전통이 생겨났다. -<조동관 약전> 중에서-
무릇 전(傳)이라 함은 <홍길동傳>이나 <전우치傳>, <유충렬傳>처럼 한문
지금부터 은척마을 불세출의 깡패, 똥깐이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풍자하다
소설은 조동관이 '똥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수다한 사연으로 시작한다. 짐작하겠지만 '동관'이 '똥깐'으로 변한 데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다만 은척읍에서 세 살 먹은 아이부터 여든 먹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동관을 칭할 때 똥깐이라 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지만 누구도 똥깐이 보고 듣는 데서는 그를 똥깐으로 부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동관으로도 부를 수 없었다. 똥깐은 은척읍 사람들에게 현존하는 권력이자 어느 누구도 감히 그 권력에 저항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그것이었다. 똥깐이에게는 이란성 쌍둥이 형이 있었는데 그는 합기도 삼 단, 유도 사 단, 태권도 삼 단으로 조은관 대신 '조십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똥깐이와 마찬가지로 조십단도 이들 형제가 듣는 데서는 감히 부를 수 없는 별명이었다.
이들 이란성 쌍둥이 형제의 별명에서 짐작하듯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학이라는 웃음 코드로 전개된다. 일반적인 傳의 형식과 달리 사회적인 악, 암적인 존재를 영웅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미약하나마 풍자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 <조동관 약전>이다. 한편 은척읍을 주먹 하나로 주름잡았던 똥깐의 죽음, 은척읍 남산의 중턱에 뭉툭히 솟아있는 못생긴 바위 동굴에서 동사(凍死)했다는 설정은 권력의 허망함을 여지없이 드러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마치 통속소설의 일부를 읽는 듯한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펜보다는 칼이 강했던 시대라는 것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은척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텔레비전이나 신문, 라디오를 보거나 들을 수 없었다'는 대목에서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신체와 양심의 자유를 철저하게 억압했던 시대의 상징적 인물이 바로 '똥깐이'였음은 삼척동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느닷없는 똥깐이의 순애보는 신화가 된 무소불위 권력의 주인공이 특정인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하튼 똥간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 여인과 다정히 팔짱을 끼고 늙은 홀어머니와 덩치가 남산만 한 제 형 은관이 사는 단칸짜리 방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그 골목 특유의 악다구니 소리와 한숨 소리가 울려 퍼진 후 똥깐은 들창이 달린 조그만 방에 신방을 차렸다. 홀어머니와 은관은 비루먹은 나귀를 팔아 나귀가 들어 있던 마구간에 방을 들여 살게 되었다. -<조동관 약전> 중에서-
깨지지 않는 신화
소설이 똥깐의 행적을 통해 비열한 권력의 속성을 파헤치고 있다면 그 주변 인물, 특히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을 통해서 권위주의나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는 이념, 제도, 법률 등을 보기좋게 비틀어주기도 한다.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똥깐이 당대의 깡패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를 뛰어넘는 명성과 위엄을 획득하게 한 그 사건, 조똥간의 생애 마지막을 불꽃처럼 장식한 그 사건은 두 번에 걸친 역전파출소 점거사건이다. 첫 번째가 사랑하는 연인의 가출이 원인이었다면 두 번째는 수컷들이 가지는 지배자로서의 본능적 자각 때문이었다.
왜, 짐승들 가운데 수컷들은 자신의 영역에 오줌똥을 갈긴다거나 나무 둥치에 자국을 내서 자신이 지배자임을 표시하지 않는가. 그 안에 다른 수컷이 들어오면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본능적으로 공격한다. 서장도 똥깐도 한 지역의 지배자로서의 자각이 강했다. 이미 다른 수컷이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경계심을 돋우고 있었다. -<조동관 약전> 중에서-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이 부임 일성으로 '읍 전체에 만연한 공권력 불신 풍조를 불식하고 사회 기강을 문란케 하는 악질 폭력 범죄를 적발, 단호히 조치하는 동시, 공권력의 권위를 회복하여 새 시대의 새로운 경찰상을 구현하자'고 역설하지만 은척 사람들 중에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던 누구처럼 말이다. 경찰서장은 임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무개의 비석을 건립한다면서 주민들에게 돈을 걷은 뒤 성금을 횡령해 부패와 독직 혐의로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고 만다.
똥깐이가 경찰서장을 공격하는 장면에서 파출소 경찰들의 반응은 읽는 이로 하여금 포폭졸도하게 만든다. 알량한 권위주의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제도와 이념 등 사회의 모순된 구조적 실체에 대한 일갈이다.
눈치 빠른 차석은 기동타격대를 부르러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다른 경찰들은 추운 바람 맞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온다 만다 하면서 한나절을 보내게 한 서장에 대한 원망에다 '쉬어'라는 명령을 들은 바 없었던 까닭에 부동자세를 유지한 채 비교적 자유로운 눈알만 굴리면서 되어가는 꼴을 보고 있었다. -<조동관 약전> 중에서-
문제는 악명 높았던 깡패, 똥깐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달구어지고 이야기 속에서 다듬어져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미 신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화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선과 악의 구별이 무용의 가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어 여전히 현재를 지배하는 신화. 눈과 귀를 봉쇄당했던 수십년 전에 자행되었던 무소불위의 권력이 21세기에 마치 되돌아가야 할 시대처럼 찬양하고 미화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각색되고 미화된 신화는 깨어져야 마땅하지만 그런 신화의 실체와 진실을 알려줄 통로가 그리 많지 않다는 현실은 불세출의 깡패 똥깐의 이야기를 더욱 더 신화적으로 과대포장할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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