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사교계의 미모의 무희 비올레타와 프로방스 출신의 순정적인 청년 알프레도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오페라 '라트라비아타'가 생경한 독자도 파바로티의 목소리로 유명한 '축배의 노래, Libiamo ne’ lieti calici'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와 알프레도가 첫 눈에 반한 장면에서 둘이 부른 노래가 바로 '축배의 노래, Libiamo ne’ lieti calici'다.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가 작곡한 '라트라비아타'는 1853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처음으로 공연됐고, 우리나라에서는 1948년 1월 명동 시공관에서 '춘희'라는 제목으로 첫선을 보였다. 오페라 '춘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연될 당시 좌우 대립이 극렬했던 정치적 혼란기였고 해방 후 아직 정부 수립도 되기 전인 경제적으로 궁핍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10회 공연되는 동안 전회 매진됐다고 한다.
참고로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원작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fils, 1824~1895, 설가, 프랑스)의 소설 <La Dame aux camelias>이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La Dame aux camelias>의 작가 알렉상드로 뒤마가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삼총사>의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삼총사>의 작가는 알렉상드로 뒤마의 아버지인 알렉상드로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 소설가, 프랑스)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다보니 헛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왜곡이 발생하고 말았다. '라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가 항상 동백꽃을 달고 다녔다고 해서 지어진 우리말 이름 '춘희'의 한자를 풀이해 보면 엉뚱하게도 '참죽나무 부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춘희'의 '椿'자는 동백나무가 아닌 '참죽나무 춘'이라는 것이다. 엄연히 잘못된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춘희'를 '동백 부인' 또는 '동백 아가씨'로 부르고 있다. 도대체 어떡하다 오페라 '라트라비아타'가 '글자 따로', '의미 따로'가 돼 버렸을까.
국어 연구가 미승우에 따르면 '라트라비아타'의 최초 번역자가 아무 생각없이 일본말을 베낀 데서 이런 오류가 발생했다고 한다. 즉 일본 사람들이 한자로 '椿姬'라고 쓴 것을 그대로 흉내 낸 데서 잘못 붙여진 이름이란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가 늘 동백꽃을 달고 다녔다고 해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동백 아가씨'를 염두에 두고 '춘희'라는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정작 '춘희'의 '춘椿'자는 동백나무가 아니라 참죽나무를 의미한다는 것.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오페라 '춘희'는 일본에서도 제목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椿'의 일본어 발음은 '짠' 또는 '찐'이다. 그리고 이 글자는 '동백나무'가 아니라 '참죽나무'를 뜻한다. 그래서 '라트라비아타'가 처음으로 일본어로 번역될 당시 '춘희'의 '椿'자는 올바른 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말썽이 많았다고 한다. 그 말썽 많은 글자를 우리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대로 베껴스고 있는 것이다. 잘못 알고 있는 일부 일본 사람들은 '춘'를 '쯔바끼'라고 읽는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동백꽃'의 일본말은 '다마쯔바끼'이다. '쯔바끼'와 '다마쯔바끼'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동백나무'와 '참죽나무'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다음백과사전에는 두 식물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동백나무 [Camellia japonica]
차나무과(茶―科 Theaceae)에 속하는 상록교목
때때로 줄기 밑동에서 많은 가지들이 나와 관목처럼 자라기도 한다. 수피(樹皮)는 회색빛이 도는 갈색이며 미끈하다. 잎은 가죽처럼 두껍고 어긋나며 앞면은 광택이 나는 짙은 초록색이나 뒷면은 노란색이 섞여 있는 초록색이다. 잎가장자리에는 끝이 뭉툭한 톱니들이 있다. 꽃은 빨간색이며 겨울에 1송이씩 잎겨드랑이나 가지끝에 핀다. 꽃잎은 5~7장이지만 꽃잎의 아래쪽은 서로 감싸고 있으며 꽃받침잎은 5장이다. 수술은 많고 기둥처럼 동그랗게 모여 있으며 수술대는 흰색, 꽃밥은 노란색이다. 암술대는 3갈래로 갈라졌다. 열매는 삭과(蒴果)로, 가을에 구형(球形)으로 익으며 3갈래로 벌어지는데 그속에는 진한 갈색의 씨가 들어 있다. 꽃의 밑에서 화밀(花蜜)이 많이 나오며 동박새가 이것을 먹는 틈에 꽃가루받이가 일어나므로 대표적인 조매화(鳥媒花)이다. 한국·일본·타이완·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참죽나무 [Cedrela sinensis]
멀구슬나무과(─科 Meliaceae)에 속하는 낙엽교목
키는 약 20m에 달한다. 수피(樹皮)는 흑갈색, 가지는 암갈색이지만 어린가지는 회갈색으로 털이 점차 없어진다. 길이가 60㎝ 정도인 잎은 깃털 모양의 겹잎으로 어긋나는데 피침형 또는 긴 타원형의 잔잎은 10~20개이며 길이가 약 8∼15㎝이다. 잎의 윗면에는 털이 없지만 아랫면의 맥 위에는 털이 있기도 하며 가장자리는 밋밋하거나 작은 톱니가 있다. 종(鐘) 모양의 작은 꽃은 6월에 원추(圓錐)꽃차례를 이루며 하얗게 무리져 핀다. 나무는 울타리나 정원수로 사용하고, 어린잎은 식용한다. 목재는 가구재로 사용하고, 뿌리의 껍질은 수렴제나 지사제로 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이고 참죽나무는 멀구슬나무과로 '과科'가 아예 다른 식물이다. 동백꽃이 붉은 반면 참죽나무 꽃은 자질구레한 연한 백색이다. 의미의 왜곡 여부를 떠나 어떤 꽃이 '라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에게 어울리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고로 '춘희'는 '동백 부인'으로 불러야 맞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라트라비아타'의 원작인 소설 <La Dame aux camelias>의 제목에서 이미 '춘희'가 잘못된 번역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소설 제목에 나오는 'camelias'는 동백꽃의 학명인 'camelia'와 같으며 '춘희'의 '춘'은 '참죽나무'를 뜻하는 '椿'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참고로 소설에서는 주인공 이름이 비올레타가 아니라 '마르그리트'이다.
유행가 가사에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말은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전혀 다른 의미의 말이 생겨나고 만다. 일제교육을 받았던 지식인들이 일본 것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봤던 문화적 사대주의의 결과가 바로 오페라 '춘희'의 이름에 얽힌 불편한 진실인 것이다. 한편 '동백 아가씨'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 굳이 한자어를 쓰려는 일부 지식인들의 현학적 태도가 이런 번역상 오류를 초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효의 화쟁사상과 박근혜의 말춤 논란 (11) | 2012.09.26 |
---|---|
재미있는 책읽기, 만화책과 깡통의 같고도 다른 것 (15) | 2012.09.25 |
독서의 해에 되새기는 문고본의 가치 (19) | 2012.09.18 |
아무리 바빠도 책 읽을 시간은 냅니다 (20) | 2012.09.16 |
정치와 우정 사이, 친구를 말하다 (25) | 2012.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