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의 일부다. 사랑의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나던 시절 찾아온 풋사랑과 함께 찾아오는 것이 짝사랑이다. 요즘 아이들이야 서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데 망설임이 없지만 불과 70,80년대만 하더라도 이성을 바라보면 얼굴부터 붉어지곤 했다. 하기야 남자학교 따로 여자학교 따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으니 요즘 남학생과 여학생이 손을 잡고 다니는 풍경을 볼 때면 격세지감을 느끼곤 한다. 짝사랑이 추억의 한 켠을 채우고 있는 것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여전히 사회적 관습의 불일치가 기억의 파편처럼 문득문득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이 붉어가는 이 때 산 정상에서 한 때 풋사랑의 대상이었던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도 그리움의 계절이 주는 낭만은 아닐런지. 혹시 아는가! 저 멀리서 가냘픈 목소리로 화답해줄지.
산을 찾는 사람치고 '야호~' 한 번 외쳐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릴 때는 맞은 편 산정상을 향해 목청껏 외치면 내 목소리가 되돌아오는 게 신기해서 연신 '야호~'를 외쳤다. 나이가 들어서는 산을 정복한 희열에 외치기도 하고 산 아래에서의 고달픈 삶을 한방에 날려 버리기 위해 입에 손을 모으고 온 힘을 다해 외치기도 한다. 발 아래 세상이 전부 내 땅인 것처럼 말이다.
이 때 멀리서 되돌아오는 내 외침이 바로 메아리이다. 한자로는 산명(山鳴)이라고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락그룹인 [산울림]이 바로 산명, 메아리의 또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얼마나 긴 하소연을 하더라도 되돌아오는 소리는 우리가 했던 말 중 끝말뿐이다. 게다가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잠시 어색함을 느낄 때도 있다. 내 외침이나 옆 사람 외침이나 돌아오는 메아리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즐겁게 외쳐도 돌아오는 메아리는 왠지 구슬프고 짠하게 들릴 뿐이다.
메아리가 생기는 원인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이 계절이 주는 낭만에 대한 모독인지도 모르겠다. 과학이 합리적일지는 모르지만 메마른 가지처럼 푸석푸석하고 딱딱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때로는 비과학적인 신화적 믿음이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슬프고 짠한 메아리. 신화를 읽어보았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치더라도 받아서 되돌려주는 목소리는 한 명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메아리는 끝말만 슬프게 들려오는 것일까?
메아리를 영어로 에코(Echo)라고 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에코는 한 때 숲의 요정이었다고 한다. 숲의 요정, 에코는 무던히도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신화 속에서 요정은 성별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숲속의 요정 에코가 수다쟁이였다면 혹시 여자(?)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수도 있다. 꼭 이런 편견이 아니더라도 에코가 여자 요정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에코가 인간세상의 한 남자를 사랑했으니 말이다. 메아리가 외치는 사람의 끝말만 어렴풋이 되돌아오는 것도 숲의 요정 에코의 수다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신 제우스는 종종 바람끼 많은 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어느날 헤라 여신은 남편 제우스가 산 속에서 숲의 요정들과 바람피우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산으로 내려온 헤라 여신은 에코에게 제우스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말하기 좋아하던 에코는 헤라 여신의 질문에 말도 안되는 수다만 늘어놓았고 그 사이 제우스는 요정들과 쾌락을 즐긴 후 숲을 떠나고 말았다.
에코의 수다 때문에 남편의 불륜 현장을 놓친 헤라 여신이 에코를 그냥 둘 리 없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헤라 여신은 수다쟁이 에코에게 말은 하되 한마디만 할 수 있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도 스스로는 말을 할 수 없고 남의 말을 받아서 끝말만 할 수 있게 말이다.
에코의 슬픈 운명이 여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에코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에코가 헤라 여신의 미움을 받아 남의 끝말만 되풀하는 운명으로 빠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숲의 요정이었다. 사랑이 죄인가요! 에코의 운명은 이룰 수 없는 짝사랑으로 또 한 번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다. 누구를 사랑했기에, 바로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반해 물에 빠져죽었던 나르키쏘스였다. 수선화(Narcissus)의 어원이 된 나르키쏘스. 자아도취의 대명사 나르키쏘스. 나르키쏘스도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다. 어찌나 자존심이 강하던지 누구라도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말하는 것도 꺼려했으니 수다쟁이 에코와 달리 나르키쏘스에게는 자폐 증세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에코는 숲에서 사냥을 즐기던 나르키쏘스를 보고는 그의 잘생긴 얼굴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나르키쏘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앞서 말한대로 헤라 여신의 저주 때문이었다. 온전히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없었으니 수다쟁이 에코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에코는 나르키쏘스가 한 말의 끝말만을 되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나르키쏘스가 독백이건 방백이건 해주면 다행이지만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면 애만 태울 뿐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사랑의 감정을 대신해야 했다.
반면 나르키쏘스는 숲 속에서 말을 할 때마다 누군가가 자신의 끝말을 되받아치는 소리에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던 에코가 나르키쏘스의 끝말만 되풀이하고 있었으니 나르키쏘스는 누군가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이미 나르키쏘스에 푹 빠져버린 에코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급기야 숲 속에서 뛰어나온 에코는 나르키쏘스를 뒤에서 덥석 끌어안고 말았다.
자신의 몸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나르키쏘스는 에코의 손을 뿌리치고는 도망치고 말았다. 에코는 너무도 창피했다. 결국 에코는 숲 속으로 들어가 나뭇잎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나르키쏘스에 대한 사람의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르키쏘스에 대한 에코의 사랑은 더욱 깊어만 갔다. 상사병을 앓고 만 에코는 나날이 수척해져 갔고 급기야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고 말았다. 목소리만 남겨둔 채....
이 때부터 에코(메아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남의 끝말만 되풀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과 요정들 중 에코만큼 불행한 이가 또 있을까? 메아리가 늘 슬프게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나르키쏘스의 비극적인 운명은 고대 그리스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 의해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된 미래였다. 강의 요정 케피소스와 리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나르키쏘스는 모든 이들의 눈을 망연자실(나르키쏘스)하게 만들만큼 빼어난 외모를 가졌지만 이런 자신을 알아서는 안될 운명이었다.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말았으니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화에는 재미있는 얘깃거리로 가득하다. 그러나 신화를 읽으며 그저 배꼽을 빼놓을만큼 웃거나 눈이 퉁퉁 부어오를만큼 울기만 한다면 신화의 가치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신화의 장면 하나하나에는 메타포(metaphor, 은유)가 숨어있다. 그렇다면 에코 신화의 메타포는 무엇일까. 사랑은 아름답다. 비록 일방적이지만 짝사랑에도 상대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있는 인간의 아름다운 성정 중에 하나일 것이다. 신화는 여기까지만 아름답게 그린다. 사랑이건 짝사랑이건 집착으로까지 발전하는 순간 신화는 늘 불행한 결말을 숨기지 않는다. 연인 사이의 사랑이 살인이라는 비극을 불러오는 경우를 종종 본다. 신화는 이런 비극의 원인을 집착이라고 얘기한다. 인간이 신을 만들었지만 신이 바라보는 인간은 이렇게 늘 어리석다. 사랑과 집착을 구분하지 못할만큼.
집착이 가져오는 비극은 비단 남녀의 사랑에만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독선이니 아집이니 불통이니 말들은 집착의 또다른 표현이다. 인간이 신은 아니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끝없는 집착이 부른 결과는 늘 자명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신념에 대한 집착은 결국 오만이 되고 오만은 불행한 최후로 끝을 맺는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목도한 인간사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행한 역사를 반복한다. 문제는 오만한 인간 자신만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념을 넘어 독선과 아집과 오만에 빠진 사람을 추려내는 것은 나를 위한 가장 현명한 선택이기도 하다.
에코가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고 숲을 뛰쳐나와 나르키쏘스를 껴안지만 않았더라면, 나르키쏘스의 유별난 성격을 그저 이해하고 바라만 보았어도 에코의 사랑은 아름다운 에피소드로 지금껏 회자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신화는 결코 그리 놔두지 않는다. 신화는 메타포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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