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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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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 신자유주의가 부활시킨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 손창섭의 /1958년 중소기업은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이런 아우성이 무색하게도 거리에는 실업자들로 넘쳐난다. 아침을 준비하듯 마지막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심에는 술에 취했는지 불빛에 취했는지 수많은 청춘들이 비틀거리는 네온사인 아래를 방황하고 있다. 방황하는 청춘들을 바라보는 사회와 국가의 시선은 차라리 냉소적이다. 편하고 깨끗한 일만 찾는다고 질타한다. 눈높이를 낮추라며 인자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전세계 어디를 봐도 이보다 더 획기적인이고 확실한(?) 실업대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만이고 직무유기다. 어디에도 국가의 책임은 없다.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동물적 울타리에 젊은 청춘들을 가둬놓은 국가는 책임 제로의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에게 방황하는 청춘들은 잉여인간 그 이상도 그 ..
1953년 부산과 2011년 대한민국의 끝의 끝 닮은꼴 손창섭의 /1953년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들은 출찰구를 빠져나오자 마자 그렇게 쓱쓱 찾아갈 곳이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그들은 한 순간에 동지에서 벗어나 그렇게 용감하게 자유를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이 부산의 끝의 끝, 막다른 끝이란 것을 모른단 말인가. 이 끝의 끝, 막다른 끝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옮기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그렇지도 않다면 정녕 이 끝의 끝, 막다른 끝까지 온 사람은 중구 자신 뿐이란 말인가. 김동리는 그의 소설 (1955년)에서 한국전쟁 당시 최후의 피난처 부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끝의 끝. 김동리는 전쟁의 상흔이 남긴 극한의 절망적 상황을 '끝의 끝'이라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단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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