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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못난 남자 손광목이 이해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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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너머 청진항 2/유시춘/1992년

 

지난 달 26일은 천안함이 침몰된 지 4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추모제가 열려 희생된 장병들의 넋을 기렸지만 추모하고 싶어도 추모식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추모식 참석을 거부당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통합진보당이 그랬다.

 

통합진보당은 천안함 침몰 이후 처음으로 '천안함 용사 추모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유족들의 반발로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비단 통합진보당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추모식에 참석했던 다른 야당 의원들도 유족과 여당, 보수 언론의 곱지않은 시선을 견뎌야 했고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명확한(?)은 해명을 강요당했다. 왜 안타까운 죽음을 두고 누구는 추모를 거부해야 하고 또 누구는 추모를 거부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유는 단 한가지다. 천안함은 북한에 의해 침몰당했다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이없는 천안함 침몰과 억울하고 안타까운 장병들의 희생 원인을 밝히려는 그밖의 노력들은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들의 그것으로 치부당하고 마는 게 요즘 현실이다. 천안함이 침몰된 지 4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북한 소행이라는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것보다 천암함 침몰 원인에 대한 여러가지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 어설픈 정부 조사결과가 여전히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합리적인 의혹' 제기는 '종북'으로 매도당하기 일쑤다. 천안함 장병들의 희생을 안타까워하고 추모하려는 마음은 다 똑같을진대 단순히 정부 조사결과에 의혹을 제기하고 좀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원인을 찾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추모도 거부당한 채 '종북'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 '안개 너무 청진항 2'는 연작 소설 <안개 너머 청진항>의 두번 째 이야기이다.
 


김 노인이 행방불명 됐다. 남파간첩이었던 김 노인은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30년간 감옥살이를 한 후 보안감호소를 나서기는 했지만 주거가 양로원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외출이나 외박 시에는 반드시 관할 담당 경찰관에게 신고를 해야 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유시춘의 소설 <안개 너머 청진항 2>는 김 노인의 실종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비록 미전향 장기수이긴 하지만 늙고 쇠약해진 김 노인에게 과거의 신념과 행적은 그저 과거일 뿐 지금은 죽기 전에 고향 땅(청진) 한번 밟고 싶은 추레한 노인일 뿐이다. 일가친척 한 명 없는 이곳에서 남파 되기 전 청진에서 의형제를 맺은 손광목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손광목을 '못난 남자'로 규정한다. 끝내 김 노인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못난 남자 손광목'을 통해 두 사람의 재회를 방해하는 현실적 요인을 고발하고자 한다. 

 

"보아하니 젊은 댁이 좋은 일 한다고 하는 모양인데 저런 노인은 조심해야 한다우."

그건 너와 나는 한편이야 하는 확인이었고 그 표시로 여자는 엷은 웃음을 살짝 내비쳤다. 모녀는 우산을 각각 하나씩 펴서 쓰면서도 내게 우산이 있느냐고 겉치레나마 묻지 않았다. -<안개 너머 청진항 2> 중에서-

 

전세계적으로 냉전이 종식된 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내편 네편'하는 편가르기에 여념이 없다. 소설이 쓰여진 당시인 90년대에 '네편'이 '빨갱이'였다면 지금은 '종북'이라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손광목이 김 노인을 끝내 만나지 않은 것도 늙은 미전향 장기수에게 연민이라도 느끼면 '빨갱이'로 몰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인공 '나'가 "지금 와서 뭐가 그렇게 두려우세요?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으세요?"라며 은근히 힐난하며 말해 보지만 끝내 손광목은 김 노인을 찾지 않았다.

 

'빨갱이'나 '종북'이 정치적으로 조장되고 활용되어 왔다는 점에서 '못난 남자 손광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후진적이고 냉전체제의 산물인 빨갱이 종북 매카시즘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게다가 '빨갱이'가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에 국한된 용어였다면 '종북'은 남북 문제를 넘어 다방면에서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에게 새기는 주홍글씨라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있다 할 것이다. 저자가 고발한 1990년대 초의 사회 분위기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아니 오히려 더 광범위한 '낙인찍기'로 '내편 네편'을 가르고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수레바퀴를 되돌리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일 것이다. 천안함을 둘러싼 논쟁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국민을 불순분자로부터 보호한답시고 십몇 년을 기약 없이 가둬놓은 그 위험인물들이 지금 어떤 사람들인지 너 봤지? 평균연령 칠십 세 고령에다 하나같이 지병 가진 환자 할아버지들이야. 그이들 중에 그 할아버지처럼 북에서 내려온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남쪽에 연고 있는 이들도 친지들이 인수를 안 하겠대서 양로원 가 있는 이들도 많단다." -<안개 너머 청진항 2> 중에서-

 

'못난 남자 손광목'이 사상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끝내 김 노인을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형체는 없지만 '내편'과 '네편'을 만들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종북 매카시즘'은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해치는 주적이 아닐까? 미전향 장기수야 그렇다치지만 이제 고령이 된 정치와 무관한 이산가족들은 사상과 이념을 떠나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정해진 장소에 여럿이 모여 낯선 카메라가 돌아가는 분위기에서 이뤄지는 형식적인 만남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안개 너머 청진항 2>는 김 노인과 손광목씨가 살았던 1990년대와 2014년 오늘의 현실이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다는 사실에 불현듯 소름이 돋는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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